“힘들어 포기하고 싶을땐 기도로 달래죠”
입력 2013-11-24 16:57 수정 2013-11-24 19:45
美의회 ‘위안부 문제’ 규탄 결의안 이끌어 낸 김동석 상임이사
김동석(56) 미국 시민참여센터 상임이사는 2007년 3월 어느 날 밤 미국 동부 95번 하이웨이를 혼자 달리고 있었다. 미 연방의회가 일본의 위안부 강제동원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뉴욕에서 워싱턴DC로 달려가는 길이었다. 이 도로를 몇 번이나 오갔는지 모른다. 1999년 레인 에번스 의원이 처음 이 문제를 제기한 뒤 8년이 지났지만 매번 결의안 채택은 일본의 벽 앞에서 좌절됐다. 일개 교민에 불과한 그가 막강한 로비력을 갖춘 일본 정부에 맞서 미국의 의원들을 설득하는 일은 너무나 힘겨웠다. 상념에 잠겨 있던 그의 옆으로 ‘쌩∼’ 거대한 트럭이 지나갔다. 순식간에 차가 팽이처럼 돌았다. 도로 밖까지 튕겨나가서야 겨우 멈췄다. 아무데도 다친 곳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났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나. 뉴욕으로 돌아가 버릴까.’
뉴욕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모는 아들을 타박했다.
“동석아, 네가 기도를 안 하니 그렇지. 이제 그만하고 돌아오너라.”
여기까지인가. 김 이사는 그 자리에서 몇 시간을 울며 기도했는지 모른다.
“그때가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는 다녔지만 그전까지는 기도도 신앙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지난 19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에서 만난 김 이사는 담담하게 고백했다. 그는 결국 그해 미 의회에서 위안부 문제 규탄 결의안 채택을 이끌어냈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포괄하는 친한파 의원 모임을 만들 정도로, 이제는 미 연방의회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인물이 됐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강연에 앞서 시간을 낸 김 이사와 인터뷰를 하는 중에도 국회의원부터 경제단체장까지 그를 만나려는 전화가 줄을 이었다.
김 이사는 “미국 의회가 위안부 문제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일본의 책임을 묻기로 한 데에는 교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다”며 “나도 그 때 신앙을 찾지 못했다면 포기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 뒤로는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남이 알아주든 아니든 혼자 이렇게 고생할 수 있는 것도 복이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모두 하나님이 제게 맡기신 일이니까요.”
그의 조부는 평양 승호리교회의 장로였다. 강원도 화천의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부친은 9명의 자녀 중 가장 신앙이 좋았던 다섯째 아들이 군에서 순직했을 때 받은 보상금으로 교회를 건축했다. 하지만 김 이사는 천국보다 이 세상에 더 관심이 많았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1984년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갔다. 거기서도 통일운동을 하다가 교민들에게서 눈초리를 받았다.
그가 교민을 위한 NGO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계기는 92년 로스앤젤레스(LA)에서 벌어진 흑인폭동이었다. 소수인종이라는 짐을 지고 사는 교민들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영어 한마디 못하는 한인들을 미국 선거에 참여시키는 운동을 시작했다. 교민들을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교민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교회인데, 정작 한인교회에서는 정치를 교회에 끌어들인다면서 싫어했어요. 유권자 등록을 받으려고 하면 교회에서 3블럭 떨어진 곳에서 하라고 하는 곳도 있었죠.”
현실의 벽 앞에 지쳐 NGO운동을 그만둬야 할지 계속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가 신앙을 찾고는 변했다.
“LA 흑인폭동 이후 저와 같은 시점에 한인 권리 찾기 운동을 벌였던 다른 단체들은 모두 얼마 안돼 사라졌습니다. 인간의 의지나 신념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한계가 있는 거죠. 할아버지가 북한에 남아 순교하셨고, 형이 군에서 목숨을 바쳤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던져서 감사함으로 해야만 지속할 수 있습니다.”
미 의회의 위안부 결의안 채택을 이끌어 낸 뒤에도 시민참여센터는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과 관련된 업체와 거기서 일을 하던 교민들이 오히려 후원을 중단했다. 미국의 엄격한 법 때문에 한국 정부의 지원은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임대료를 내지 못해 사무실을 나와야 했을 정도다.
“일본의 방해와 견제가 더 심해졌지요. 그걸 모두 혼자서 견뎌야 했어요.”
한인의 권리를 찾기 위한 활동이 20년을 넘으면서 이제는 응원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역 대학과 연계해 인턴쉽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한인 청소년을 교육하고, 주민들을 위한 시민학교도 운영한다. 재정이 넉넉지 않아 최근에는 새벽기도를 다니며 고민한 끝에 상근 직원을 줄이기도 했지만, 김 이사는 이 일을 포기할 수 없다. 미국내 한인의 투표율은 많이 높아졌지만 아직 40%대다. 유태인은 80%가 넘는다.
“솔직히 고백하면, 제가 여기서 그만둘까봐 저도 두렵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아무 것 아닐지 몰라도 제가 감당하기에는 여전히 너무 어려운 일이거든요. 제가 유혹에 넘어가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게 저의 가장 큰 기도제목입니다.”
그는 미국의 한인교회에게도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한인교회가 교민과 우리의 자녀들을 모범적인 미국시민으로 성장시키는 역할을 꼭 해야 합니다.”
김 이사가 얘기하는 ‘모범적인 미국시민’이란 지역사회의 일에 참여하고 선거와 같은 정치 활동에도 적극적인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몇가지 일화를 들려주었다. 한인타운의 한인가게에 불이 났는데, 불 끄러 온 사람은 대부분 백인이었다. 미국 바로 아래에 위치한 아이티에서 지진이 났을 때도 적지 않은 한인교회가 한국의 모금기관에 성금을 보내, 정작 미국 적십자나 지역단체가 모금을 할 때에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이런 한국인들이 얄밉지 않겠어요? 2차대전 때 일본이 진주만 폭격을 하자 미국 내 일본인들이 감금당했습니다. 9·11테러 때는 뉴욕의 무슬림 활동가들이 어려움을 겪었어요. 한국인도 미국에선 아시아계 중에서도 소수민족일 뿐입니다. 우리 자녀의 미래를 생각해보면, 미국에서 소수민족의 정치 참여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 달린 문제입니다.”
이달 초 뉴욕시장 선거를 앞두고 뉴욕순복음연합교회에서 유권자등록 캠페인을 벌이는 등 교회의 호응도 커지고 있다. 김 이사는 “미국이 이스라엘을 저렇게 보호하는 이유도 미국에 사는 600만명의 유태인들이 똘똘 뭉쳐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라며 “조국을 위해서라도 미국 내 200만 한인이 미국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