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태원준] 상수동 골목 이야기

입력 2013-11-24 17:28


서울 지하철 6호선 상수역 부근에 가끔 찾는 골목이 있다. 의성방앗간 명성이발관 한솔마트 같은 고색(古色) 간판이 드문드문 걸려 있는 곳이다. 제주 돔베고기를 파는 식당이 있고, 맞은편 선술집은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에도 요깃거리를 준다. 이 한적한 곳에 몇 해 전부터 작은 카페와 식당, 갤러리가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큰길 건너 ‘홍대 앞’에서 밀려난 이들이 주로 여기에 둥지를 틀었다.

책을 잔뜩 꽂아놓은 골목 중간의 카페는 원래 홍익대 정문 쪽에 있었다. 인디밴드 멤버인 주인이 2004년 그냥 사무실이던 점포를 빌려 독특한 인테리어의 북카페로 운영했다. 젊은 예술가의 공연과 전시회가 수시로 열리면서 하나의 복합문화공간이 됐다. 5년쯤 지나 홍대 앞 ‘명소’로 자리 잡은 어느 날 건물주가 찾아왔다. 조카들이 여기서 장사하려고 하니 나가라는 거였다.

우리나라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은 임차인의 계약갱신권을 5년간만 보장한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던 사무실을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가는 공간으로 바꿔놨지만 우리 법은 그 부가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는 가게를 빼야 했고 건물주는 그 자리에 비슷한 카페를 열었다. 그 공간에 5년 동안 공들여 입힌 무형의 가치는 한푼도 보상받지 못했다.

그렇게 밀려나 이 골목에 들어온 지 4년. 몇 달 전부터 이 외진 동네도 들썩이고 있다. 서교동 홍대 앞을 한바탕 휩쓸며 임대료를 끌어올려 ‘자영업자의 무덤’으로 만든, 그래서 ‘골목사장 분투기’란 책까지 나오게 했던 부동산 바람이 이곳에도 찾아왔다. 그런데 그 행태가 좀 고약하다.

이 골목의 한 건물은 얼마 전 주인이 바뀌었다. 그러면서 1층에 있던 카페가 문을 닫고 그 자리에 다른 가게가 들어섰다. 임대료는 월 120만원에서 200만원으로 올랐다. 옛 건물주는 빚이 많았다. 시세가 9억원인데 근저당 설정액이 9억원에 육박했다. 이런 속사정은 등기만 떼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이런 동네에서 하는 첫 작업은 각 건물의 등기를 떼보는 것이다.

적당한 타깃 건물이 정해지면 중개업자는 매수자를 물색한다. 별로 어렵지 않다. 이 건물을 사는 데 필요한 돈은 건물값에서 빚을 뺀 약간의 차액과 세금, 중개수수료뿐이다. 빚만 떠안으면 살 수 있다. 그 빚의 이자는 어떻게 하냐고? 임대료를 올리면 된다! 홍대 앞 상권이 지난 10년간 팽창을 거듭할 때 많은 건물에서 이런 식으로 임대료가 뛰었다.

이렇게 거래가 성사되면 중개업자는 그 동네 미용실에 간다. 미용실은 확성기다. 어느 건물 임대료가 얼마로 올랐다고 슬쩍 흘리면 다른 건물주들 귀에까지 들어가는 데 며칠 걸리지 않는다. 건물주들이 “나만 손해 볼 수 없지” 하며 중개업소에 드나드는 동안 세 든 자영업자 속은 타들어간다.

이 골목 어귀에서 카페 겸 갤러리를 운영하는 김남균씨는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을 결성해 활동 중이다. 가수 리쌍의 가로수길 건물에서 분쟁이 있었던 막창집, 건물주의 갑작스러운 재건축 통보로 쫓겨나게 된 서울 방화동 ‘카페 그’ 주인도 이 모임 회원이다.

최근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이 일부 개정됐지만 임차인의 ‘영업권’을 법으로 보장하고 계속 강화해가는 일본 유럽에 비하면 턱없이 미흡하다. 3대에 걸쳐 한곳에서 장사하는 ‘라멘야(집)’ 같은 문화는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구조다. 청년들에게 충분한 일자리를 만들어줄 경제성장이 어렵다면, 중·장년에게 넉넉한 연금을 보장해줄 재정이 없다면 장사라도 맘 편히 하게 해줘야 하지 않겠나.

태원준 사회부 차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