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하태림 (6) 내가 살아가는 이유 ‘봉사’ 위해서 신학대 입학

입력 2013-11-24 19:13


병원 봉사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매주 토요일 찬양을 하는 것 외에 주중에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상담도 했다. 원목실에 소속돼 일하다 보니 환자들로부터 신앙적인 질문을 받을 때도 있었다. 전문적 교육을 받아야겠다고 느꼈다. 내 믿음은 확실했고,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신학적 지식을 기초로 한 조언을 해주기에는 부족했다. 기도 끝에 신학교에 가기로 결심했다.

1992년 서울 냉천동 총회신학교에 입학했다. 낮에는 병원에서 사역을 해야 했기에 야간 과정으로 학교에 다녔다. 학장 박병진 목사님을 비롯해 훌륭한 선생님들과의 만남은 내게 큰 축복이었다. 교회법의 권위자인 박 목사님은 하나님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도를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시기에, 오직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도를 따라야 하며 이것을 떠나는 순간부터 엄격한 의미에서 그 집단은 벌써 하나님의 교회일 수 없다고 가르쳐 주셨다. 배움은 즐거웠다. 대학 진학 대신 직장을 택했었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은 항상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필요를 이렇게 채워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필요를 채워주셨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했고, 나는 삶을 같이 살아줄 반려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1급 지체장애인에 애까지 있는 홀아비를 누가 거들떠보겠는가. 사람의 기준으로는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능하게 하셨다. 사랑의 선교회에 동참한 봉사자들 가운데 지금의 아내 강명옥 사모가 있었다.

당시 22세 대학생이었던 아내는 불광동 ‘다윗과 요나단’ 카페에서 열렸던 1회 음악회에 봉사자로 처음 참여했다. 관심을 먼저 보인 것은 아내였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픔을 이겨내고 주님과 약속을 지키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나와 결혼을 한다면 이 사회 구석에서라도 조그만 빛을 발할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단다. 아내는 봉사자로 묵묵히 5년간 나를 지켜본 뒤 마음을 고백했다. 딸아이에게도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했다.

그러나 결혼하기까지는 순탄치 않았다. 하루는 아내의 오빠가 나를 찾아왔다. “긴말 필요 없고, 내 동생 만나지 마시오.”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말에 위축되지 않았다. 전신마비 판정을 받았던 나를 하나님은 살려 주셨고, 동행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든 순간부터는 두려울 게 없었다. 아내의 오빠에게 “나도 힘드니 나에게 관심 갖지 말라고 동생에게 전하라”고 말했다. 아내의 오빠는 황당해서 말을 못 이었다. 아내에게는 “난 장인 장모님께 가서 당신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할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장인 장모님의 반대는 거셌다. 아내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집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금식을 시작했다. 열흘 가까이 금식 끝에 두 분은 두 손을 드시고 결혼을 승낙하셨다.

나는 장인 장모님이 결혼식장에 확실히 오셔야 결혼을 한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무슨 배짱이냐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난 항상 담대했다. 다행히 장인·장모님은 오셨다. 결혼식은 서울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올렸다. 주례는 박병진 목사님이 해주셨다. 박 목사님은 주례를 시작하자마자 “이 결혼을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성사가 안 된다. 반대한다면 지금 당장 의사를 표하라”고 하셨다. 혹시나 반대하는 이들이 있을까봐 속으로 움찔했다. 다행히도 우리의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