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3부) 새 패러다임을 찾는다] (34) 獨통일은 외교의 힘

입력 2013-11-24 18:52 수정 2013-11-24 23:20


독일 통일 원치않는 英·佛·蘇에 맞춤식 외교 구사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에도 제2차 세계대전 4대 전승국 중 미국을 제외한 영국 프랑스 소련은 독일의 통일을 바라지 않았다. 독일 통일을 완성시킨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훗날 당시 상황에 대해 “주변국들의 반응이 얼음처럼 차가웠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서독 정부는 노련하고 적극적인 외교로 이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준비된 외교로 1년도 채 안돼 전승국들의 마음을 돌리고 통일을 이뤄낸 것이다.

#소련 프랑스 영국은 통일 독일을 바라지 않았다

동독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소련은 가장 적극적으로 독일 통일을 반대했다. 동독은 40여년간 유지했던 ‘철의 장막’의 최전선에 있었고, 미국과 서유럽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어막이기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국민이 무려 2000만명이나 사망했던 아픈 기억도 가지고 있었다. 독일 통일 분위기가 무르익던 1989년 10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세계는 두 개의 독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옆에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가 생겨나는 게 탐탁지 않았다. 지난 100년 동안 세 번이나 독일의 침략을 받은 나라였기에 더더욱 통일 독일을 두려워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 독일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는 수모를 겪은 탓에 ‘통일 독일’에 알레르기 반응을 가지고 있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콜 총리가 “독일인들은 자결권(自決權)을 가졌다”고 하자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곧바로 “유럽의 안정과 평화는 동·서독이 모두 존재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맞불을 놓기도 했다. 갈수록 유럽에서의 입지가 약화되고 있던 영국도 유럽에서의 영향력 감소가 우려돼 독일 통일에 반대했다.

4대 전승국 중 유일하게 독일 통일을 지원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서독이 유럽대륙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기 때문이었다. 서독은 초대 아데나워 정부부터 친미·친서방 정책을 취한 데다 1983년 미국의 중거리미사일 배치를 수용하며 미·소 간 중거리미사일 폐기협정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독일이 결국 유럽의 중심 국가가 될 것이고, 통일 독일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 유럽에서의 미국 영향력을 확보하겠다’는 계산도 작용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맞춤식 외교로 통일 이룬 독일

1980년대 말 유럽은 격변의 장이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가 온 유럽을 뒤흔든 시기였다. 또 유럽 내부에서 유럽공동체(EC)를 넘어 유럽 통합이라는 거대한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독 정부는 동·서독 주민들의 통일 열기를 이용해 주변국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서독은 먼저 가장 우호적이었던 미국에 ‘통일 독일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계속 잔류한다’는 약속을 했다. 친미 정책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서독은 미국을 이용해 영국과 프랑스가 통일을 승인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서독은 독일 통일이 유럽 통합을 더욱 앞당길 수 있다고 수차례 호소했다. 콜 총리가 1989년 11월 유럽 의회에서 “유럽 통합이 진일보해야만 독일 통일이 완성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 통합이라는 대의명분에 서독의 손을 들어줘야만 했다. 독일 통일은 1994년 유럽연합(EU) 발족과 1999년 유로화 도입에 기여했다.

소련에 대해선 급격한 개혁·개방으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점을 십분 활용했다. 바로 ‘수표 외교(Checkbook Diplomacy)’였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서독이 소련에 투자한 직간접적 지원은 무려 438억 달러(46조3000억원)나 됐다. 서독은 또 소련군 철수 비용으로 73억5000만 달러를 지급했고, 동독이 소련에 지고 있던 채무 약 75억 달러도 승계했다. 서독의 수표외교로 결국 소련은 통일 독일의 나토 및 EC 잔류를 인정하고, 통일을 승인했다.

#통일을 완성시킨 ‘2+4 회담’

독일 통일은 ‘2+4 회담’이라는 최종 절차를 거쳐 완성됐다. ‘2+4 회담’이란 동·서독과 4대 전승국 외무장관들이 모인 회의다. 사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통일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4대 전승국의 동의가 있어야만 했다. 전승국들은 4개 승전국의 회담에 2개 패전국(동·서독)이 참여하는 ‘4+2 회담’을 바랐다. 4강 회의에 동·서독이 옵서버 형식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하지만 콜 총리와 한스 디트리히 겐셔 서독 외무장관의 막후 협상으로 ‘2+4 회담’으로 바뀌었다. 동·서독 회담에 4대 전승국이 참여하는 것으로 사실상 서독이 통일 협상의 주인이 된 것이다. 서독은 결국 4차례까지 이어지는 ‘2+4 회담’을 통해 통일의 마침표를 찍었다. 독일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통일을 스스로의 외교적 힘으로 이뤄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베를린=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