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헝가리와 비밀 교섭 통해 동독 주민 대량 탈출 길 터

입력 2013-11-24 17:13 수정 2013-11-24 23:27


통일 완성시킨 콜 서독 총리-겐셔 외무장관

독일 통일 외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한스 디트리히 겐셔 서독 외무장관이다. 이들은 시대를 읽는 안목과 결단력, 치밀한 외교로 통일 독일을 완성시켰다. 염돈재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은 24일 “콜 총리와 겐셔 외무장관은 각각 정확한 상황 판단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평화 외교로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서 “우리도 통일을 위해선 이들의 장점을 아우를 수 있는 외교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과단성과 속전속결로 통일 독일의 초대 재상이 된 콜 총리



콜 총리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외교술은 198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물결이 온 유럽을 휩쓸었을 때 유감없이 발휘됐다.



먼저 그는 통일의 도화선이 된 1989년 5월 헝가리의 오스트리아 국경선 철조망 제거와 관련해 ‘비밀 협상’으로 큰 역할을 했다. 당시 헝가리는 국경선 철조망을 없앴지만 동독 정부와 맺은 여행협정에 따라 철조망을 넘는 주민들을 동독으로 송환했다. 이때 콜 총리는 헝가리 총리와의 비밀 교섭을 통해 5억 마르크(약 3650억원)의 차관을 제공하는 대신 헝가리가 동독과의 여행협정을 파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콜 총리의 외교는 대부분 인접 국가가 통일 독일을 달가워하지 않는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콜 총리 외교의 특징은 과단성과 속전속결이었다. 그는 통일 논의가 계속되던 1990년 11월 주변국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독일과 유럽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하며 통일을 기정사실화했다. 당시 콜 총리는 주변국들이 이 계획을 미리 알게 될 경우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해 미국과만 협의한 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콜 총리는 이런 반응을 예상하면서 “주변국들이 이 계획에 대해 폭넓게 지지하리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실수가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콜 총리는 10개항 계획을 발표한 이후에도 주변국들의 동의를 얻는 데 사력을 다했다. 그는 통일 직전 10개월 동안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8번,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10번, 고르바초프 서기장과는 4번 만나 이들 국가의 동의를 얻어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급속히 전개된 독일 통일 과정에서 콜 총리는 통일 독일이 앞으로 유럽 공동체의 일부로서 유럽 통합을 발전시키는 데 이득이 된다고 설파했다.



#화해와 균형이라는 ‘겐셔리즘’ 창시자, 겐셔 외무장관



겐셔 외무장관은 자유민주당 당수였다. 빌리 브란트·헬무트 슈미트(사회민주당), 헬무트 콜(기독민주당) 총리와 같은 정당 소속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대연정을 통해 1974년부터 1992년까지 18년간 외무장관을 지냈다. 동·서독 화해와 교류라는 동방정책(Ostpolitik)이 정권이 바뀌어도 계승된 것은 겐셔 외무장관의 개인적 역량 때문이었다. 냉전시대 동·서유럽 화해와 동·서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 그의 외교철학을 두고 ‘겐셔리즘’이라는 외교 용어까지 나오기도 했다.



겐셔 외무장관은 동독 출신이었기에 누구보다 통일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또 오랜 기간 외교 수장을 지내며 누구보다 상황을 정확히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고, 주변국 주요 인사들과의 친분이 깊었다.



그는 1985년 3월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취임한 순간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통일 기회가 올 것을 예견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힌 바 있다. 그는 곧바로 콜 총리에게 “소련은 무너진다. 그러면 베를린 장벽을 쌓았던 주체가 무너지는 것”이라고 보고했다. 서독 정부는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개혁·개방 정책을 지지했고,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외교로 통일을 준비했다.



그는 또 1989년 여름부터 시작된 동독 주민의 대규모 탈출 사태가 곧바로 통일로 연결될 것을 확신했다. 이에 1989년 9월 동독 주민 6000여명이 국경을 넘어 체코 프라하에 있는 서독 대사관으로 몰려들었을 때 직접 그곳을 찾았다. 그리고 대사관 난간에서 “자유를 위해 당신들을 해방시킨다”는 명연설을 남기고 동독 주민 모두에게 서독 비자를 발급했다. 물론 막후에선 체코 및 동독 정부와 협상으로 이들을 모두 서독으로 데려갈 수 있도록 합의가 된 상태였다. 대사관 명연설이 있은 지 4주 후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주변국들과의 회담에선 그의 풍부한 인맥이 힘을 발휘했다. 통일 절차가 거의 마무리된 ‘4차 2+4 회담’이 끝난 날 새벽 1시에 택시를 타고 제임스 베이커 미국 국무장관을 만났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영국이 회담 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움직임을 보이자 평소 친분이 있던 베이커 국무장관을 찾아 영국을 설득하도록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는 “수십년 동안 독일 통일이라는 별은 두꺼운 구름에 가려 있었다. 잠깐 구름이 걷히면서 별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별을 잡아챘다”고 회고했다. 그는 정확한 상황 판단과 외교력으로 독일 통일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베를린=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

■ 자문해주신 분들

△김재신 주독일 대사 △리아나 가이데치스 독일환경자연보전연맹(분트) 그뤼네스 반트 센터장 △베르너 페니히 독일 베를린자유대 명예교수 △신은숙 민주평통 통일정책자문국장 △악셀 슈미트 괴델리츠 독일 동서포럼 이사장 △알렉산드라 힐데브란트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장 △우베 리켄 독일 자연보전청 경관생태국장 △이봉기 주독일대사관 통일관 △크리스토프 보네베르거 전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 교회 목사 △한나 베르거 베를린 장벽박물관 홍보담당관 △최월아 민주평통 북부유럽협의회장 △한스 모드로프 전 동독 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