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김혜림] 현대판 창씨개명을 지켜보며
입력 2013-11-22 18:27
벌써 여러 해 전 일이다. 단체 구성원의 성향과 지향점이 달라 냉전을 거듭하던 여성단체들이 하나로 뭉쳤다. 호주제 폐지를 위해서였다. 여성단체의 양대 산맥인 한국여성단체연합과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물론 크고 작은 단체들이 1998년 9월 발족한 ‘호주제폐지를위한시민의모임’에 참여해 한목소리를 냈다.
당시 쓴 기사들은 사실을 왜곡하진 않았으나 시각은 ‘여성’ 편향적이었다. 호주제가 폐지되기 바랐던 기자는 기사 구성에 신경을 썼다. ‘남녀 불평등한 제도이니 폐지돼야 한다’는 정공법은 남성들의 호응을 얻어내기 어려울 테니 우회 전략을 택했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해 호주제로 인한 피해를 겪고 있는 가정 취재에 나섰다.
전 남편 딸 둘을 데리고 재혼한 여성 탤런트는 재혼한 남편이 친아빠인 줄 알고 자라는 딸들이 호주제 때문에 전 남편 성을 갖고 있다면서 호주제 폐지 운동에 적극 나서겠다고 진보 여성잡지와 인터뷰를 했다. 이거다 싶었다. 아이들 아픔에는 공감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므로.
여성단체 상담실을 취재해보니 일반인 사례도 적지 않았다. 재혼한 남녀가 각각 전 배우자의 아이를 데리고 결혼한 가정에선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재혼해서 얻은 아이에게 형 누나들과 성이 왜 다른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형제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데 성이 달라 놀림을 받아 큰아이가 우울증에 걸렸다’ 등등.
이들에게 전화하니 기자라고 하면 바로 끊거나 만나긴 해도 ‘사진은 절대 찍을 수 없다’고 버텼다. 한 가족을 어렵사리 설득해 촬영 허락을 받았지만 기사를 포기했다. 재혼 가정의 자녀 성 문제는 호주제가 폐지되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고, 더구나 호주제가 폐지된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으니 재혼 가정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아버지와 자녀, 형제자매의 성이 같아야 정상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10여년 전 일이 떠오른 것은 이 사회가 여전히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고 있구나 하는 아쉬움 탓이다.
성동 이씨, 강동 정씨, 송파 박씨, 광진 김씨…. 왠지 어색하지만 귀에는 익다. 새롭게 창설되는 성본(姓本)이니 처음 들어보는 것들일 테고, 그 본이란 게 서울시 자치구의 명칭이니 또 낯설지는 않다. 요즘 지자체들은 앞다퉈 결혼이주여성 한국이름 지어주기를 펼치면서 이렇게 성본까지 창설해 준단다. 현대판 창씨개명(創氏改名)인 셈이다.
결혼이주여성들은 한국식 성과 이름을 받아들고 환히 웃는다는데 그들의 마음까지 밝을까. 가족과 자신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성명을 그들은 왜 고칠까. 지자체들은 결혼이주여성들의 자녀가 엄마 이름 때문에 또래들로부터 놀림을 당하거나 이웃들이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불편해도 복잡한 절차와 비용 때문에 개명을 못 했던 것을 돕고 있다고 큰소리다. 이름만 고쳐서 될 일인가. 피부색과 생김새도 우리와 비슷하게 만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월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한국국적 취득자, 그리고 그 자녀는 140여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2.8%나 된다. 인구학자들은 외국인이 2020년에는 전체 인구의 5%, 2050년에는 9.5%로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때 5000년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이 우리의 자랑거리였지만 지금은 글로벌 시대다. 다문화사회는 필수다. 다른 것을 같게 만들려는 노력을 다른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데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김혜림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