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입북→ 남측 송환→ 구속… 윤봉길 의사 조카의 삶

입력 2013-11-22 17:50 수정 2013-11-23 01:41


윤모(66)씨는 매헌 윤봉길(1908~1932) 의사의 친조카다. 윤 의사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서울의 명문고와 사립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대 작은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했다. 84년 정부로부터 윤 의사 유족 배려 차원에서 ‘전신주 부착 광고 영업 독점권’을 받아 광고업체를 운영했지만 12년 만에 폐업했다. 이후 다시 언론계에 몸담았지만 신용카드 대금 연체로 일과 중에도 변제 독촉전화를 받게 되자 2000년 4월 퇴사했다.

그러는 사이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했다. 잠시 휴대전화 기기 영업사원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2005년부터는 뚜렷한 직업 없이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활했다. 그해 12월부터 2009년 8월까지는 서울 양재동 ‘매헌기념관’ 지하 1층의 1.5평 크기 숙직실에서 기거했다. 기념관 관계자는 “숙직실은 재활용 쓰레기를 모아두는 장소인 데다 곰팡이도 피어 있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수준”이라고 전했다. 윤씨는 이 무렵 ‘한국에서 고통받느니 북으로 가자. 윤 의사 조카인데 다른 사람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지 않겠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결국 2009년 8월 중국으로 출국해 주중 북한 대사관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윤 의사의 조카라는 사실을 밝혔지만 북측의 담당 참사는 “아직 본국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며 입북을 허락하지 않았다. 윤씨는 이에 지린(吉林)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같은 해 10월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려 강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수영에 미숙해 10븖를 떠내려가다 도강을 포기했다. 그러고는 다음해 1월 얼어붙은 두만강 위를 걸어서 끝내 월북했다.

윤씨는 북한 보위부의 조사를 받으며 “북한의 사회주의가 좋아서 왔다. 글을 써서 통일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0년 3월 북한 강원도 원산에 있는 초대소에 수용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는 다른 밀입북자들과 함께 원산항 분향소를 방문해 헌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씨는 북한이 지난달 25일 밀입북자 6명을 우리 측에 송환할 때 포함돼 다시 남으로 돌아왔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검사 최성남)는 국가보안법상 잠입·탈출 등 혐의로 윤씨를 비롯해 송모(26) 이모(64)씨 등 3명을 구속 기소했다고 22일 밝혔다. 이씨는 북한에 함께 들어갔던 아내(55)를 목졸라 살해한 혐의(살인)도 받고 있다. 이씨는 자신을 조사했던 북한 기관원과 아내의 관계를 의심했다고 한다. 월북자 6명 중 나머지 3명은 앞서 지난 12일 재판에 넘겨졌다. 윤 의사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윤씨는 오래전 사람이라 지금 직원들 중에 그를 아는 사람이 없다”며 “윤 의사 유족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느냐”고 했다.



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