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 안 부러운 ‘정선5일장’] 여~가 장터래요… 맛난 거 골라 보드래요

입력 2013-11-23 05:50


거대 공룡인 대형마트의 철저한 마케팅에 밀려 전통시장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시장과 대형마트의 경쟁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다. ‘필패’로 예상되는 이 싸움에서 전통시장이 ‘향수(鄕愁)’와 ‘정(情)’, ‘문화’, ‘관광’ 이라는 승부수로 대형마트를 압도하고 있는 곳이 있다.

강원도 정선5일장(정선아리랑시장)이다. 꺼져가는 불씨를 살려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고 있는 정선5일장을 찾아가 봤다.

◇기차여행=지난 17일 오전 11시57분 정선역. 무궁화호 열차가 경적을 울리며 플랫폼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자 300여명의 관광객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정선5일장 관광열차’가 도착한 것이다. 정적이 흐르던 플랫폼이 이내 관광객들의 웃음소리로 떠나갈 듯하다. 관광객들은 카메라 셔터를 바삐 누르며 추억 만들기를 시작했다. 인천에서 온 김영자(74·여)씨는 “90년도까지 정선에서 살았는데 이후 인천으로 이사가 살고 있다”며 “과거 석탄산업이 발전했던 시절 유명했던 정선5일장이 그리워 친구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고향을 다시 찾았다”고 말했다.

이 열차는 장이 열리는 날(끝자리 2, 7일)에만 청량리와 정선을 하루 한 차례 오간다. 청량리에서 오전 7시50분 출발하는 기차를 타면 정선역에 오전 11시57분쯤 도착한다. 1999년 코레일이 정선5일장의 활성화를 위해 도입한 이 열차는 입소문이 나면서 지금은 예약하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을 정도다. 때문에 1인 근무역인 정선역은 장날만 돌아오면 북새통을 이룬다. 이윤식(47) 부역장은 “정선5일장 열차가 도착하고 서울로 출발하는 시간에는 열차 이용객이 평소 10배에 달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말했다.

◇축제장=정선역을 빠져나와 10여분을 걸어 도착한 정선읍 정선5일장에서는 신명나는 우리가락이 흘러나왔다. 장구·꽹과리 소리가 시장판을 가득 메우자 흥에 겨운 관광객들의 즉석 춤사위가 펼쳐졌다. 구경하던 관광객들도 연신 사진을 찍고 어깨를 들썩였다. 이어진 노래자랑 순서에서는 어느 누구랄 것도 없이 마이크를 붙잡고 각자의 ‘18번’을 뽑아냈다. 말 그대로 거대한 축제판이 벌어졌다. 가족들과 함께 시장에 온 김영남(36·서울)씨는 “대형마트는 삭막함이 느껴지지만 전통시장은 따뜻한 정과 생기가 넘쳐 나는 게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정선5일장 장터무대에서는 매년 4월부터 11월까지 정선아리랑 공연을 비롯해 색소폰, 통기타 연주 등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변혜진 정선아리랑시장협동조합 총무팀장은 “정선5일장의 문화공연은 시장에 생기를 불어넣는 요소 중 하나다. 시장에 오면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고 귀띔했다.

◇인산인해(人山人海)=규모가 7600㎡나 되는 정선5일장은 오후 내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파가 북적였다. 시장 한복판은 가격을 흥정하는 상인과 손님 간 실랑이로 왁자지껄했다. 물건을 많이 판 상인들의 표정은 연신 싱글벙글하고, 좋은 물건을 싸게 산 손님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폈다. 호떡과 어묵, 수취떡, 붕어빵 같은 주전부리도 허기진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수수부꾸미와 메밀전병, 콧등치기국수, 곤드레나물밥 등 전통 먹을거리를 파는 식당들은 자리가 없어 길게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할머니들은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전병을 구워댔지만 팔려나가는 속도를 미처 따라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시장 중앙통로에서 수수부꾸미·녹두전을 굽던 박현숙(61·여)·김선정(64·여)·배연아(70·여)씨는 “인터넷을 통해 입소문이 나면서 서울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하루 장사가 끝나면 팔이 아플 정도로 힘들지만 손님이 북적대야 더 신명나게 일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신뢰=장터 곳곳에 좌판을 펼쳐놓은 할머니들이 목에 걸고 있는 명패도 눈길을 끌었다. 할머니들은 90여명으로 모두 ‘신토불이증’이라는 명패를 달고 있다. 김종순(70) 할머니는 “직접 농사를 짓거나 산에서 딴 도라지와 산나물 등을 시장에서 판매하는 사람만 신토불이증을 받을 수 있어. 이걸 달면 손님들도 나를 믿고 물건을 사”라며 웃음을 지었다. 신토불이증은 정선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 장에 갖고 나오는 주민에게 군과 시장협동조합이 발급하는 일종의 ‘보증수표’다. 관광객들이 이 목걸이를 착용한 상인의 물건을 주로 사기 때문에 수입산 또는 다른 지역의 농산물이 발을 붙이지 못한다. 때문에 시장에는 산에서 직접 따온 곰취, 참나물, 고사리 등 산나물과 싱싱한 지역 농산물이 즐비하다.

전통시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시식코너’도 눈길을 끌었다. 상인들은 “맛을 보고 물건을 살 수 있어 손님들도 좋아하고 매출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파장(罷場)=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시장통로는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시장에서 산 특산품을 양손에 한가득 든 손님들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청량리로 가는 막차를 타기 위해서다. 정선5일장 열차는 정선에서 오후 5시49분에 출발해 오후 9시50분쯤 청량리에 도착한다. “저녁식사 시간보다 다소 이른 시간에 출발하기 때문에 미리 장터에서 식사를 하거나 기차 안에서 먹을 것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고 관광객들은 조언했다.

파장을 준비하는 상인들의 표정에서는 아쉬움보다 여유가 묻어났다. 5일 뒤 또다시 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장날마다 어머니를 도와 전병을 판매한다는 전은정(25·여)씨는 “중장년층 손님이 가장 많지만 최근에는 20∼30대 젊은 관광객들의 발길도 늘고 있다. 우리 전통시장을 많이 애용해 달라”며 수줍게 웃었다.

1966년 2월 시작된 정선5일장은 2004년 한 달 평균 방문객 수가 7000∼8000명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연간 3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린다. 지난해에는 한국관광공사의 ‘한국 관광의 별’ 쇼핑부문 1위에 선정됐다. 전통시장의 예스러움과 시골장터의 정, 문화, 주변 관광지가 한데 어우러져 산촌 작은 마을이 일약 전국 최고의 관광지로 바뀌었다. 지금은 전국 각지에서 연간 200여개 시장이 정선5일장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정선5일장이 대형마트에 맞설 해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선=글·사진 서승진 기자 sjse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