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병권] 역봉쇄정책, 러시아를 활용하자

입력 2013-11-21 18:13


“전략 선택의 폭 넓어지고 세력 균형도 취할 수 있어 적극 검토해 볼 만하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우방은 미국과 일본이다. 일본은 과거 여러 차례 우리를 침략한 적도 있거니와 국교정상화한 지도 상대적으로 오래되지 않아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국어보다 영어를 더 잘해야 출세가 보장되는 현실이 단적으로 증명한다.

해방 전후 혼란스러웠던 공간에서 맹활약한 미국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역할이 결국 오늘날 굳건한 한·미동맹의 틀을 만들었다. 부질없는 가정이긴 하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이른바 임시정부 세력이 헤게모니를 잡았더라면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중국과의 관계가 지금보다는 한층 강화되지 않았을까.

자신이 주도하는 유엔의 힘을 바탕으로 전후 세계 질서를 재편한 미국은 절대 강자임에 틀림없지만 최근의 영향력은 많이 떨어졌다. 베트남전 참패 이래 아프가니스탄과 시리아 등지에서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재집권한 러시아의 푸틴이 여전히 마초적인 행보로 지구촌의 눈길을 확 끌어당기고 있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을 정도다. 도청 의혹과 공화당의 공세에 밀려 초라한 리더십을 행사하는 오바마와 대비된다.

어쨌든 미·중·일 3대 강대국과 무지막지한 북한에 둘러싸인 우리는 이들을 적절하게 다뤄 자주독립을 지켜내고 나라를 우뚝 서게 만드는 것이 예나 지금의 외교 목표다. 이런 관점에서 자주적인 힘을 기르는 데 많은 역할을 한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 틀을 벗어나 눈을 저 멀리 러시아로 돌릴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동로마 제국의 후예임을 자임하는 러시아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우리와 체제나 사상이 많이 달라 가까이 하기가 쉽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유쾌하지 못한 기억도 많다. 명성왕후 시해 후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난 갔던 고종 시대에 이권을 모두 앗아간 국가가 바로 러시아다. 해방 직후 북한에 진주해 간악한 행패를 부린 것도 그들이다.

그렇지만 이미 과거는 흘러갔다. 물밑에서 국가간 치열한 이권다툼이 노골적으로 벌어지는 현대 외교전에서 언제까지나 과거의 감정을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다. 러시아는 중국과 갈등하고 견제하는 사이이고, 일본과도 영토분쟁으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기본적인 공조 조건의 자격을 갖췄다는 말이다.

사실 일부 정치학자들은 우리보다 북한의 김일성이 일찍부터 중국과 소련의 틈바구니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중·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6·25 남침을 허가받지 않았는가. 북한을 손아귀에 두고 싶어 한 스탈린과 모택동을 찾아가 지원을 이끌어냈다. 한마디로 중·소의 힘을 역으로 이용하는 재주를 부리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와는 달리 우리는 우방인 미·일의 길항관계를 제대로 이용하는 화려한 외교전 대신 미국 일변도에 올인했다. 지금까지 이 전략은 대단히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의 의지에 관계없이 미국의 뜻에 따라 이라크 파병을 단행한 이후에는 미국과의 일방적인 관계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일본의 집단적자위권 보장을 둘러싼 미·일의 밀월관계를 마땅찮게 보는 시각도 많다.

당장은 아니지만 국제사회에서의 러시아의 위치를 면밀히 검토하고 우리와의 접합점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점검해야 할 때가 왔다. 북한은 입만 열면 아무 이론적 배경도 없는 통미봉남(通美封南)을 버릇처럼 외치고 있다. 유치할 정도로 미국에 구애하면서 우리는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은가.

북한 핵을 머리에 이고 사는 우리도 러시아를 우리 외교의 한 파트너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중국과 함께 북한을 압박하는 역봉쇄정책을 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전략 선택의 폭이 훨씬 넓어지고 세력 균형도 취할 수 있는 등 이점이 적지 않다. 국내 정치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라 밖으로 눈길을 돌리자.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