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e&deep] “이윤보다 가치”… 사회적 기업 살리는 착한금융 뜬다

입력 2013-11-21 17:32 수정 2013-11-21 22:10


‘사회적 금융’ 사례와 실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탐욕으로 얼룩진 금융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월가의 대형 금융회사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비우량 주택담보대출)처럼 위험성 높은 상품과 파생상품을 만들어 갚을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팔았다. 금융사들은 막대한 이익을 챙겼지만 서민들은 시한폭탄이 된 파생상품 때문에 빚더미에 올랐다. 한국에서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약탈적 대출’이란 말이 대두하면서 금융권이 비판을 받았다. 이런 행태는 사람들이 금융을 ‘나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착한 금융 지향하는 사회적 금융=이익 추구에만 몰두하는 탐욕적 금융의 반대편에선 사회적 금융이 있다. 사회적 금융은 경제적 이익보다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에 자금을 빌려줌으로써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새로운 금융형태다. 저소득층에게 담보 없이 대출해주는 마이크로크레디트와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과 같이 사회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에 대출·투자하는 것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선진국에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민간 부문의 사회적 금융 움직임이 활발하다. 국내에서도 사회적 기업 육성법 제정 이후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에 대한 금융지원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회적 은행은 네덜란드의 ‘트리오도스(Triodos) 은행’이다. ‘세 개의 길’이란 이름을 가진 이 은행은 사람, 환경, 이윤의 세 가지 길을 가기 위해 친환경, 유기농, 예술기획, 공정무역 등의 윤리적 사업에 집중 투자한다. 전 세계 43개국에 740만명 이상의 고객을 확보하고 있으며 2012년 현재 자산규모는 80억 유로(약 11조6000억원)로 1980년 설립 당시 54만 유로(약 8억원)였던 데 비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사회적 은행의 대출 절차는 일반 은행과 조금 다르다. 영리은행이 소요자금 규모의 적정성과 자금 조달 방안의 타당성을 먼저 따지는 반면 트리오도스 은행은 자금이 지원되는 프로젝트가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먼저 판단한다. 그 후 프로젝트가 재무목표 이상의 사회·문화·환경적 이익을 창출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살핀다. 지속 가능한 사회적 사업분야 대출을 통해 트리오도스 은행은 해마다 140억원 이상의 순이익을 실현하고 있다. 트리오도스 은행 사례는 금융을 통해 이윤과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국내서도 사회적 금융 움직임=한국에서도 초보적 단계이긴 하지만 사회적 금융이 시행되고 있다. 2003년 설립된 비영리단체 ‘사회연대은행’은 마이크로크레디트와 함께 빈곤·고용·환경·문화 등의 가치를 실현하는 사회적 기업에 대출해줌으로써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제공되는 건강한 공동체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회연대은행 관계자는 21일 “지난 10년간 마이크로크레디트 창업지원 누적액은 340억원, 사회적 기업 지원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60억원”이라며 “사회적 기업에 대출뿐 아니라 경영컨설팅 등 창업과 성장을 위한 지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사회적 금융은 민간보다는 정부 주도적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부 기관이 운용하는 미소금융, 특례보증, 모태펀드 등을 통해 제도권 금융으로부터 자금 조달이 어려운 사회적 기업에 저금리로 대출 지원이 이뤄진다. 시중은행들은 따뜻한 금융을 표방하며 각종 사회공헌 활동에는 적극 나서고 있지만 사회적 금융 시행에는 소극적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은행들의 태도가 바뀔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월 금융감독원은 시중은행 부행장들과 제2금융권 임원들을 만나 사회적 금융 활성화 방안을 논의했다. 이에 따라 향후 국내 금융권에서도 사회적 기업의 안정적 수익기반 확보와 자금생태계의 선순환을 유도하는 사회적 금융의 활성화 방안이 마련될 것으로 예상된다.

구체적으로 사회적 기업의 제품을 일정비율 이상 구매하는 ‘구매목표비율제’와 사회적 기업·협동조합 지원을 위한 전용 대출·예금상품을 개발할 것으로 보인다. 중장기적으로는 이윤이 아닌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법인을 위한 새로운 신용평가시스템도 도입될 예정이다.

◇사회적 금융 지속되기 위해선 ‘사회적 은행’ 필요=사회적 금융 전문가들은 자생력 확보 차원에서 한국에서도 사회적 은행이 설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사회투자 곽제훈 기획조정실장은 “영리은행의 사회적 금융 지원은 한계가 있고 정부재원에만 의존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며 “현재 비영리단체 중심인 사회적 금융을 사회적 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이 주도할 때 자금 순환을 통한 사회 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적 은행 설립을 위한 제도 정비와 인식 제고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는 신간 ‘새로운 금융시대’에서 금융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금융의 부정적 측면을 지켜본 이들에겐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금융이 부자를 위한 대리인에 머물지 않고 더 많은 사회구성원을 위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할 때 오히려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은애 기자 limitle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