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하태림 (5) “받은대로 갚겠다” 목발 짚고 병원 복도서 찬양을

입력 2013-11-21 17:18


사고 후 1년이 지난 1989년 11월, 부평 병원에서 퇴원해 고향 근처로 내려가 요양키로 했다. 인천에 계속 머무르면 여동생이 너무 힘들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는 진도로 가자고 하셨지만 고향사람들에게 내 몰골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진도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해남의 한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병간호는 남동생 2명과 어머니가 맡았다. 두 발로 서는 것은 가능해졌지만 걸을 수 있는 거리는 목발을 짚고도 겨우 몇 발짝뿐이었다. 병원에서 하는 것 외에도 동생들과 매일같이 재활훈련을 했다. 두 명의 동생들은 각각 내 양쪽 어깨를 받치고 함께 걸었다. 중학생이었던 막내동생은 작은 몸집으로 낑낑대며 도왔다. 수백 번은 넘어진 것 같다. 그래도 같이 넘어지고, 격려해주는 동생들 덕에 마음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6개월을 꼬박 노력한 끝에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었다. 온전치 않아도 걷게만 해달라던 내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신 것이다. 몸을 회복하면 하나님의 증인이 되겠다고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내가 잘 알고,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야 했다. 부평의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들었던 청년들의 찬양이 생각했다. 삭막하던 일상에 그들의 찬양은 힘이 됐었다. 가끔 꽃을 들고 찾아와 건네던 말은 위로였다. 1990년 7월 당시 혜화동에 있던 고려대병원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병원에 양해를 구하고 복도에서 찬양을 부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매주 토요일 병원을 찾아갔다.

서울에 머물 곳이 필요했다. 결국 여동생의 신세를 지게 됐다. 여동생은 주중에는 일을 하며 내 생계를 책임졌고, 토요일에는 병원 사역을 함께했다. 하나님은 감당할 만한 시련을 주시고, 너무 힘들 때는 피할 길도 주신다. 여동생은 나에게 ‘피할 길’이었다. 함께할 동역자가 더 필요했지만 사람을 모을 방법을 몰랐다. 답답한 마음에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을 찾았다. 무작정 기도했다.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섰는데 혼자서는 너무 힘듭니다. 부디 저와 함께할 이들을 세워주십시오.”

지하철과 기도원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함께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기도와 행동을 같이 하니 응답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기도원에 다녀온 다음 주, 병원 인근 교회 청년 3∼4명이 “소문을 듣고 왔다”며 함께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런 일이 매주 반복되더니 몇 달 만에 인원이 50여명으로 늘었다. 단체의 이름을 짓기로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한다는 의미로 ‘사랑의 선교회’로 정했다.

사람이 늘어나니 할 수 있는 사역의 범위도 넓어졌다. 단순히 찬양을 불러주는 것 외에 환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을 들어주는 일도 병행했다. 퇴원 후 오갈 곳이 없는 환자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한번은 퇴원 후 가족에게 버림받아 갈 곳 없던 80대 할머니를 서울 상봉동 비닐하우스 교회로 모시기도 했다. 한 환자의 형님이 개척한 교회였다. 선교회를 통해 할머니의 사연을 알게 된 그 교회에서 할머니를 맡아주기로 했다. 소망교회 여전도회에서도 그 소식을 듣고 한 달에 10만원씩 후원을 해줬다.

조금 더 체계적인 행사도 기획했다. 바로 ‘음악회’였다. 서울 불광동에 ‘다윗과 요나단’이라는 카페를 빌려 일일찻집 형식으로 제1회 음악회를 진행했다. 많은 관객이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음악회는 이후 유명 복음성가 사역자들과 수천 명의 관객이 참여한 음악회들의 시발점이 됐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