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 지붕 위 빗소리로 남은 사랑의 자취… 김연수 소설집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입력 2013-11-21 17:13
문예지에 발표되는 소설가 김연수(43)의 단편들을 찾아 읽게 되는 건 그의 체험이라 할 팩트(fact)와 허구의 비율이 어느 정도 될까, 하는 궁금증에서다. 최근에 읽은 그의 단편은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이다.
병원에 입원 중인 작가 ‘나’는 김일성대학교와 서울대학교를 다닌 바 있는 원로 선배작가를 우연히 병동에서 만난다. 정대원이라는 그 작가는 ‘24번 어금니로 남은 사랑’이라는 작품으로 한 때 인정을 받았는데 그는 ‘나’에게 서른다섯 살에 찍은 사진 한 장을 “그 시절에 나는 인생이란 이슬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사진 속의 나는 북한 시절 ‘전치과’에서 막 이빨을 뽑고 나오는 길인데 사진을 찍어준 사람은 그 치과에서 일하던 간호사”라면서 손바닥에 24번 어금니를 올려놓는다. 그때 뽑은 24번 이빨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는 간호사와 석 달 동안 동거를 했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려준다.
이런 이야기 전개가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다. 그랬더니 정대원은 실제로 ‘24번 어금니로 남은 사랑’이라는 작품을 쓴 실제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김연수는 정대원이란 원로 작가를 병원에서 만났다는 말인가. 하지만 김연수에게 불쑥 전화를 걸어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온당치 않을 것이다. 그게 사실이든 허구든 이 모든 건 소설이고 이게 바로 소설이니까.
더구나 김연수는 정대원이 쓴 “자기 경험의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괴로운 것이다”라는 문장까지 소설에 차용하고 있다. 이런 소설적 착상은 우리가 세계와 시대로부터 무언가를 빌려 쓰고 있으며 그 채무의 대상엔 고통도 포함된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들려준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 말할 수 있는 건 소설가가 쓰는 모든 소설이란 결국 타인에게서 차용한 이야기를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 줄 아는 임차(賃借) 의식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를 가늠하는 일은 헛수고에 불과하다. 하지만 임차 의식이라는 문학적 본질 면에서 김연수는 단연 우리 문단에서 귀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런 임차 의식이 집대성된 소설집이 최근 출간된 ‘사월의 미, 칠월의 솔’(문학동네)이다. 소설집은 표제작과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을 비롯해 모두 11편이 수록됐다. 김연수가 마흔을 훌쩍 넘기더니 소설 속 인물을 대하는 태도가 한층 신중해진 것 같아 기대를 갖게 한다. 그중에서도 표제작은 수작이다.
소설 속 ‘나’는 미국으로 유학 간 애인을 만나러 갔다가 내친 김에 플로리다에 사는 이모를 찾아가는데 언뜻 이모의 삶은 유쾌하고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이모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다들 이모보다 먼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마침내 이모의 숨겨진 사랑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젊은 시절, 한국에서 영화감독과 석 달을 동거했는데 그는 중병에 걸려 곧 사망했고 뱃속의 아이 역시 중절 수술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는 그런 이야기 도중에 이모는 아름다운 시절에 내린 빗소리에 대해 들려준다. “미래가 없던 두 연인이 3개월 동안 살던 집. 말했다시피 그 집에서 살 때 뭐가 그렇게 좋았냐니까 빗소리가 좋았다고 이모는 대답했다. 자기들이 세를 얻어 들어가던 사월에는 미였다가 칠월에는 솔까지 올라갔던 그 빗소리.”(‘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서)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소설 속 이모가 아니라 김연수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소설 속 인물들의 관계를 이렇게 아름답게 끌고 가는 김연수의 솜씨가 한층 무르익고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