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못한 예산안 심사… 정쟁 국회, 세비 받을 자격 있나

입력 2013-11-20 17:49 수정 2013-11-20 22:09


정국 파행으로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 심사가 기약 없이 늦춰지고 있다. 헌정 사상 초유의 준예산 편성 사태에 직면하거나 여야가 극적 합의점을 찾더라도 시간에 쫓겨 예산안을 부실·졸속 심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준예산’이나 ‘부실심사’ 중 어떤 상황을 맞더라도 혼란은 피할 수 없다. 여야가 이제는 대치 정국을 매듭짓고 예산안 심사에 전념해야 한다는 질책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시작도 못한 예산안 심사…연내 처리 불투명=내년도 예산안의 국회 처리 시한은 12월 2일로 2주도 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여태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예비심사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법정 기한을 지키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갔고, 연내 처리도 어렵다는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1월 1일∼12월 31일을 회계연도로 정한 현행 예산안 제도가 도입된 1963년 이후 국회가 기한 내 예산안을 처리한 것은 22번에 불과하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관계자는 20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상임위 예비심사에 1주일, 예결위 심사에 15∼20일 소요되는 점을 감안하면 12월 2일을 지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아직 한 달 이상 시간이 남아 있지만 연내에 처리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헌법은 정부가 예산안을 편성해 회계연도 개시 90일 전(10월 2일)까지 국회에 제출하면 국회는 30일 전(12월 2일)까지 이를 의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회가 연내 예산안을 처리하지 못할 경우 정부는 준예산을 편성해야 한다. 준예산은 국회 의결이 있을 때까지 헌법·법률에 따라 설치된 기관의 유지·운영, 법률상 지출의무 이행, 이미 예산으로 승인된 사업의 계속 등을 위한 경비만 전년도 예산에 준해 집행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하지만 헌법 외에 준예산 집행에 대한 구체적인 법 규정이 없고, 과거 편성된 사례가 없어 실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렵다.

기획재정부 예산정책과 관계자는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법정 지출, 계속 사업비 등은 전년도에 준해 편성하지만 새로 시작하는 사업 등 나머지 것들은 모두 멈춘다고 보면 된다”며 “이건 원칙적인 이야기이고 사실 한번도 해 본적이 없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지침이 없다”고 말했다.

◇지금 당장 시작해도 부실·졸속 심사 피할 수 없어=예산안 ‘늑장 처리’는 관행처럼 굳어졌지만 올해는 사정이 더욱 녹록지 않다. 우선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의혹, 2007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유출 의혹 및 폐기 수사를 둘러싼 여야 갈등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정부 질문, 감사원장 임명동의안 처리 등이 남아 있어 국회 일정 자체가 파행을 빚을 가능성도 크다. 여야가 당장 예산안 심사에 착수하더라도 시간이 빠듯한데 시작 자체가 힘든 상황이다.

서울산업대 행정학과 김재훈 교수는 “정부는 국회에서 심의·확정한 예산안을 토대로 다시 세부적으로 배정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며 “예산안 처리가 늦어지는 만큼 그 시간이 없어지기 때문에 교육, 복지 등 중요한 사업이 지체되거나 내부적으로 혼선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 원로들은 예산안 부실 심사가 국가 재정을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 출신인 강봉균 건전재정포럼 대표는 은행회관에서 열린 정책토론회에서 “국회가 행정부의 방만한 재정활동 감시를 소홀히 하며 예산안 처리를 정쟁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전년도 회계감사를 6월 말까지 완료하고, 타당성 없는 선거공약 사업은 예산에 반영하지 않도록 하는 등 국회 예·결산 심의 절차 개혁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이선미 간사는 “예산은 곧 민생이기 때문에 예산안 처리가 늦어지는 데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며 “국가의 1년 예산을 매년 연말 시간에 쫓겨 졸속·부실·늑장 처리하는 국회의원들이 월급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권지혜 백상진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