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게티즈버그 연설 150주년… “미국이여! 국민의 국가를 완성하라”
입력 2013-11-21 05:36
272자 짧은 연설의 감동은 한 세기 반의 세월이 흘렀지만 한 치도 퇴색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그 울림이 더욱 커진 듯했다.
19일(현지시간) 오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 ‘국립 병사묘역(Soldiers’ National Cemetery)’.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문구로 유명한 미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15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쌀쌀한 초겨울 날씨에도 1만여명의 시민들이 몰렸다.
해병군악대는 150년 전 그날 링컨이 참석한 게티즈버그 전몰자 묘역 헌정식에서 연주됐던 곡들을 다시 들려줬다. 검은 턱수염과 높은 모자 등 링컨 모습을 한 대역은 물론 북군의 장군과 사병, 당시 주민들의 복장을 한 재연자들이 참석자들을 맞았다.
톰 코베트(공화)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는 “링컨은 어떠한 나라가 돼야 하는지를 정의함으로써 미국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링컨의 말은 단순했고, 신념은 깊었으며, (언어의) 천재성은 심오했다”며 “링컨은 연설문을 종이에 썼을 뿐 아니라 우리 가슴에도 그것을 새겼다”고 추모했다.
이날 기조연설을 한 남북전쟁사 연구의 대가 제임스 맥퍼슨은 “오늘날 우리는 하나의 연방국가를 당연히 여기고 있지만 만일 링컨이 없었더라면 북아메리카는 두개 또는 여러개의 분열된 국가로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라며 “게티즈버그 전투는 미국의 운명을 바꾸고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가져온 운명의 축이었다”고 전했다.
맥퍼슨은 이어 “통일된 미합중국이 없었다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른 뒤 어떤 종류의 세계가 출현했을까”라고 반문한 뒤 “분명한 것은 2010년대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는 결코 아니었을 것”이라며 링컨의 연설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링컨의 연설이 위기에 처한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가치를 확인시키고 세계에 부활시키는 데 촉매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링컨의 정신은 100년 뒤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에 가장 정확히 표현됐다”고 지적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대표해 나온 샐리 주얼 미국 내무장관은 이날 게티즈버그 연설 길이와 정확히 같은 272단어의 짧은 연설을 해 주목을 받았다.
주얼 장관은 “150년 전 링컨 대통령은 세계가 우리의 말을 주목하지 않고 오래 기억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틀렸다”며 “게티즈버그 전투가 미국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었던 것처럼 링컨의 말은 국민의식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링컨의 말은 지금 우리에게 미완의 작업을 완성하라고 요청하고 있다”며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가와 정부를 완성하는 작업을 계속하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드루 길핀 파우스트 하버드대 총장은 17일자 워싱턴포스트(WP) 기고문에서 사회적 불평등 심화와 연방정부 셧다운(부분 업무정지) 등 민주적 정치제도의 실종을 예로 들면서 링컨의 유산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미국의 현실을 비판했다.
기념식 끝 무렵 연설 재연행사도 주목을 받았다. 링컨과 거의 똑같이 생긴 대역자가 연단에서 특이한 억양, 어눌한 말투, 딱딱한 제스처까지 고스란히 흉내내며 게티즈버그 연설을 되살려냈다. 청중은 마치 150년 전 전사자 추모식 행사장에 와 있는 듯 숨죽인 채 2분 남짓한 연설의 한마디 한마디를 곱씹었다. 연설이 끝나자 청중 사이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기념식장 옆으로 3500명의 북군 전사자들이 묻힌 반원 형태의 묘지가 내려다 보였다. 다양한 모양의 십자가가 빼곡히 꽂힌 영원한 안식처 위로 당시 군가로 애창된 ‘공화국찬가(Battle Hymn of the Republic)’의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게티즈버그=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