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수민 기자 필리핀 르포-이제는 장기 재건으로] 피해자도 봉사 진정한 자립 시작됐다

입력 2013-11-20 17:38 수정 2013-11-20 22:31


“눈을 감아도 눈앞에 훤히 펼쳐지던 고향의 건물들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전부 부서지고 있었어요.”

구호단체 굿네이버스 필리핀지부의 매니저 에드가 몰보스(39)씨는 지난 8일 TV 뉴스에 나오는 고향 소식을 보고 절규했다. 대학 진학 전까지 18년간 살았던 타클로반이 슈퍼태풍 하이옌을 만나 생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타클로반에서 차로 4시간 거리인 몬탈반모니시팔리티의 산이시드로 사업장에서 일하던 그는 고향 집에 수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통신이 모두 두절된 상태였다. 바닷가에서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부모님과 남동생, 여동생 가족, 삼촌과 친지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굿네이버스 타클로반 구호 2팀에 자원해 지난 15일 타클로반에 들어왔다. 몰보스씨는 “참으려 했지만 공항에 내린 순간부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가족은 무사했다. 이후 그는 지역 조사, 사례 발굴, 구호품 배급까지 모든 과정에 발 벗고 나섰다. 굿네이버스의 안형구(40) 필리핀 지부장은 “몰보스씨는 지역 주민을 구호 대상이 아닌 함께 일하는 파트너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타클로반 구호 사업은 이제 긴급 구호에서 장기적인 재건 지원 사업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외부 단체의 지원보다 피해 지역 주민들의 자활 기반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타클로반 구호 사업에 참여한 굿네이버스 직원 18명 중 12명이 필리핀 현지 직원들인 것도 이 때문이다. 안 지부장은 “현지 직원들이 징검다리가 돼서 피해 지역 주민들이 자원봉사 등에 적극 참여토록 유도하는 게 진정한 자립으로 가는 길”이라며 “피해자 스스로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대부분의 구호단체는 재난 발생 후 한두 달이 지나면 긴급 구호를 접고 철수한다. 도시 빈민이 많아 구호단체 활동이 활발한 필리핀도 예외는 아니다. 유엔인도주의업무조정국(UNOCHA)은 이런 문제를 방지하려고 타클로반에서 매일 오후 6시 회의를 열어 장기 체류할 NGO를 선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굿네이버스는 장기 재건 사업의 일환으로 피해 주민들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등을 치료하는 심리치료 모델 도입을 검토 중이다. 심리치료는 재난 발생 7일 후부터 시작되는 게 이상적이지만 현실 여건상 대부분 미뤄지기 일쑤다. 안 지부장은 “어린 아이일수록 재난 상황에서 받는 상처를 마음속에 감추며 성장한다”며 “이들의 상처가 어떻게 발산될지 모르기 때문에 특히 어린이 심리치료가 절실하다”고 설명했다. 몰보스씨는 “필리핀은 2차 세계대전에서도 살아남았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며 “시간이 지나더라도 상처받은 타클로반을 잊지 않고 응원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굿네이버스 후원계좌 우리은행 1005-301-611036, 후원전화 1599-0300, 홈페이지 www.gni.kr).

타클로반=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