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고승욱] 백지영 에일리 이자스민

입력 2013-11-20 17:34


최근 인터넷 댓글 문화가 잠시 달라진 적이 있다. 포털과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스타’를 비방하거나 거친 욕설을 퍼붓는 악플이 많이 줄었다. 연예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유언비어도 심하지 않았다. 네티즌들이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퍼트리거나 악플을 달 때 상당히 조심하고 있다는 분위기가 확연히 느껴졌다. 지난달부터 이런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악플과 유언비어가 형사처벌 대상이라는 생각이 급속하게 확산됐기 때문이다. 물론 10년 가까이 이어진 선플 달기 캠페인의 성과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악플을 달았다가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지는 사람이 실제로 있다는 ‘체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악플 처벌 잇따르면서 주춤

가수 백지영씨 사건이 대표적이다. 백씨는 자신에게 입에 담기 어려운 악담을 퍼부은 네티즌 11명을 경찰에 고소했고 이들 중 고등학교 2학년 학생, 공익근무요원, 20대 직장인이 입건됐다. 이들이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뒤늦게 뉘우쳤다는 신문과 방송의 보도가 줄을 이었다.

아나운서 황수경씨 사건도 영향을 줬다. 유언비어를 유포한 사람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인터넷은 시끌시끌했지만 양상은 조금 달랐다. 옛날 같았으면 ‘권력이 어떻다’는 식의 난폭한 댓글이 난무했을 텐데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네티즌이 스스로의 힘으로 악플을 물리친 사례도 있었다. ‘윤후 안티카페’는 쏟아지는 비난 속에 비공개로 전환해 자취를 감췄다. 악플에 맞서 ‘윤후 사랑해’라는 선플로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를 바꿔놓은 결과다. 철모를 때 속옷 모델로 나섰다가 뒤늦게 사진이 공개된 가수 에일리는 “힘내라”는 격려를 받으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다. ‘드디어 인터넷이 달라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태풍 하이옌이 필리핀에 상륙한 뒤 그런 생각은 송두리째 사라졌다. 필리핀 돕기에 앞장섰던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에게 쏟아진 댓글은 단순한 악플을 뛰어넘었다. 모욕의 정도는 연예인을 비방할 때보다 더 심했다. 외국인 혐오증, 인종차별이라는 편협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게 놀라웠다. 기사마다 달려 있는 댓글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의 수준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성금 낼 돈으로 독거노인을 돕겠다’ ‘이 의원이 외국인이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라는 댓글에는 자기기만과 허위의식이 강하게 배어나왔다. 헛웃음이 나왔다.

근절까지 갈 길이 멀다

댓글을 단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아이디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고 더 놀랐다. 평소 논리적으로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행정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던 경우가 제법 있었다. 실제 그 사람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만일 같은 사람이라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가 따로 없다. ‘이 의원이 새누리당이 아니라 민주당 소속이었다면 좀 덜했을까’ ‘일부 악플러들이 연예인을 욕하면 고소당하니까 정치인으로 방향을 돌렸나’라는 생각이 든 것은 악플에 상처를 받았을 이 의원에게 변명이라도 하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치졸하지는 않다고 주장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베르사유 궁전에는 원래 화장실이 없었다. 풍속사가들은 아름다운 건물에 화장실을 짓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렇다고 사람이 화장실 없이 살 수는 없다. 결국 당시 프랑스에서는 모든 건물에 의무적으로 화장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법이 만들어졌다. 인터넷 공간도 마찬가지다. 고약한 생각도 어딘가에서 받아줄 수 있어야 한다. 감정을 배설하는 통로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이 개와 다른 점은 아무데서나 지르지 않고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화장실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고승욱 디지털뉴스센터 온라인뉴스팀장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