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18) 한국교회와 인권운동
입력 2013-11-20 17:03
여성·노동자·외국인 근로자 등 시대마다 약자의 손 잡아줬다
“한국 여자들은 성만 있고 이름 없어 이 부인 김 소사니 부인 칭호 좋지만은 허다한 이 부인에 허다한 김 소사를 그 뉘라서 분별할까.”
1906년 6월 13일자 ‘제국신문’에 실린 ‘여하무명’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이처럼 당시 여성들은 이름이 없었다. 집안에 갇혀 사는 여인의 이름을 구태여 지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봉건적 가부장제 사회였던 조선시대 여성에게 인권이란 없었다.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됐다. 사회활동은 극도로 제한됐고 교육받을 기회도 드물었다. 기본적 인권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인격적 대우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여성들의 지위를 향상시킨 것은 기독교였다. 19세기 말 개신교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남녀평등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문자를 깨우치고 성서를 읽었으며 전도활동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기독교는 여성인권에서 더 나아가 노동자와 이주노동자 등 소외된 이들의 인권 향상에 큰 몫을 해왔다.
◇여성인권 운동=여성인권 향상을 위한 한국교회의 첫걸음은 ‘간음하지 말라’는 7계명을 ‘준교리화’시킨 것이다. 19세기 말 조선에는 축첩제도가 있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이를 철저히 배격했고 교회도 이를 받아들여 첩을 둔 사람은 교회에 들이지 않았다. 1910년 새문안교회에서는 노병상이라는 사람이 축첩을 이유로 출교됐다. 같은 해 동대문교회의 지교회였던 각심사교회의 송신묵은 목사의 권면에 따라 자신의 첩을 내보냈다.
한국교회는 50년대 처음으로 여성목사 안수를 허용함으로써 양성평등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첫 여성 목사는 55년 3월 13일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에서 배출됐다. 서울 정동제일교회 전밀라, 명화용 두 전도사가 이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74년 여성 목사를 허용했고 77년 시각장애인 여성 양정신에게 처음으로 목사 안수를 했다.
60년대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도 높아졌다. 그러나 대부분 저임금, 미숙련 단순 노동에 집중됐다. 이들은 공장일과 ‘식모’일을 하며 성추행의 위협, 인간적 멸시와 천대를 겪었다. 기장은 이들의 인권 향상에 앞장섰다. 70년대 기장 여신도회는 경멸적 의미의 ‘식모’ 명칭을 ‘돕는 이’로 바꾸고 버스 여차장을 ‘안내양’으로 부르자는 운동을 벌였다. 여신도회는 78년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투쟁에도 적극 동참했다. 그해 2월 21일 어용 노조와 회사 측이 여성 노동자들에게 ‘똥물’을 끼얹자 여성 단체들과 함께 모금운동에 나섰고 대통령에게 공개서한도 보냈다. 한국교회는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가 짓밟힐 때마다 성금 모금, 성명서 발표, 진정서 제출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 및 연대 활동을 펼쳐왔다.
◇노동자 인권운동=80년대 중반까지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살인적인 저임금으로 고통 받았다. 한국교회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57년 3월 미국연합장로교 해외선교부 아시아산업전도담당 헨리 존스 목사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예장 통합 총회는 ‘산업전도위원회’를 만들었다, 이어 58년 서울 영등포 지역에서 산업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61년 기감은 인천에서, 대한성공회는 강원도 황지에서 산업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기장(63년), 한국구세군(65년), 기독교대한복음교회(73년)도 잇따라 산업선교에 나섰다.
78년 동일방직 노조 탄압사건이 발생했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비인간적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교훈에 따른 선교활동이라고 천명했다. 79년 YH무역회사 폐업 사태 후 산업선교 관련자들이 무더기 구속되기도 했다. 산업선교 활동은 80년대에도 계속돼 노동자들의 권익이 향상되고 노동조합이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일조했다. 이후에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권 향상을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주노동자 인권운동=이주노동자 등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수는 지난 6월 현재 150만명을 넘어섰다. 2003년 체류 외국인이 67만명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10년 만에 국내 체류 외국인 수는 배 넘게 증가했다. 한국 사회는 이미 외국인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다문화·다인종 사회가 됐다. 필연적으로 이주노동자 인권과 다문화가정 통합 문제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92년 이주노동자 선교단체인 ‘희년선교회’가 이주노동자 상담과 의료 지원, 쉼터 등을 제공하면서 한국교회는 이주노동자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같은 해 외국인노동자선교위원회를 설립했다. 김해성 목사는 94년 성남에 ‘외국인 노동자의 집’을 세웠다. 외국인을 위한 센터가 서울 안산 광주 양주 등에 각각 설치됐다.
갈릴리교회는 외국인 노동자 무료진료를 처음으로 시작했고 여의도순복음교회 온누리교회 명성교회 충현교회 주안장로교회 등이 이 사역에 뛰어들었다. 이후 이주노동자 자녀에 대한 지원과 한글·컴퓨터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또 농촌교회를 중심으로 다문화 가정의 사회통합을 위한 다양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자문해주신 분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 △박용규 총신대 신대원 교수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 △이상규 고신대 부총장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