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 희망 틔우는 필리핀 피셔맨빌리지 르포] 태풍이 할퀸 땅에 다시 서는 판잣집

입력 2013-11-20 05:08


“엄마, 동생 아직 안 죽었어요. 숨 쉬고 있단 말이에요!”

계속해서 밀려드는 파도에 연거푸 물을 마시면서도 둘째 안젤리언(8·여)이 엄마 안지 에쿠아(33)씨에게 소리쳤다. 팔에 안긴 생후 18개월 남동생 안젤라는 이미 숨을 거뒀지만 안젤리언은 품에 안은 동생을 한사코 놓지 않았다. 에쿠아씨는 숨진 막내 안젤라를 둘째 딸 손에서 억지로 떼어냈다. 안젤리언과 안젤로(13·여) 두 아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밀려드는 파도에 휩쓸려 물속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이들을 마을 청년 두 명이 발견했다. 에쿠아씨는 “나는 내버려두고 아이들 좀 제발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고 청년들은 가까스로 세 모녀를 구해 지붕 위로 올렸다. 안젤라의 작은 시신은 그날 저녁 해변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됐다. 슈퍼태풍 하이옌이 닥친 지난 8일 필리핀 타클로반의 바랑가이 88 지역(일명 피셔맨 빌리지)에서 에쿠아씨 가족은 그렇게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다.

지난 18일 오전 고철을 이어붙인 지붕 아래에서 흙탕물에 젖은 옷가지를 빨던 에쿠아씨는 “두 살도 안 된 막내를 잃었지만 우리 네 가족이 여전히 숨 쉬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안젤로가 천식을 앓고 있어 이 가족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약이다. 에쿠아씨는 “안젤로가 열흘이나 천식약을 먹지 못했다”며 “하루빨리 의약품 지원을 받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젤로는 엄마 곁에서 마른기침을 계속 뱉어냈다.

하이옌은 피셔맨 빌리지 초등학교에서만 50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희생자는 대부분 안젤라처럼 어린아이들이었다. 피셔맨 빌리지는 왼쪽에 칸카바토만, 오른쪽에 태평양을 끼고 있는 작은 반도다. 하이옌이 닥치자 양쪽 바다에서 밀려든 지진해일에 마을은 아수라장이 됐다. 빈민층 2200여 가구가 모여 살던 판잣집들은 거센 파도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복구 작업은 도심부터 시작돼 이 마을에선 상대적으로 늦어졌다. 19일 거리 곳곳에는 사람 키보다 높은 쓰레기더미가 여전했다. 이동하려면 쓰레기더미를 피해 먼 길을 빙 돌아가야 한다.

주민들은 폐허를 딛고 다시 터전을 짓는 데 전념하고 있다. 바닷가엔 이미 떠내려 온 각목을 이어 붙인 제법 구색을 갖춘 판잣집이 들어섰다. 부서진 지붕 조각으로 외벽을 만들고 천장을 덮었다. 뜨거운 태양을 피할 그늘이 만들어지자 사람들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최고기온이 32도를 기록한 이날 마을 청년들은 온몸을 땀으로 적셔가며 부서진 각목에 못을 박았다.

엄마들이 무너진 집터에서 빨래를 정리하는 동안 아이들은 쓰레기더미를 껑충껑충 뛰어넘어 맨발로 해변을 달렸다.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봉제 인형은 형형색색의 빨래와 함께 판잣집 곳곳을 이은 빨랫줄에 걸려 있었다.

이웃과 가족, 생활을 잃어버리고도 다시 바닷가에 집을 짓는 게 두렵진 않을까. 마크 얀지(49)씨는 서툰 영어로 연신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큰 어려움을 이겨냈으니 이제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계획하는 일이 감사하다”며 활짝 웃는다. 지역 조사를 마무리한 굿네이버스는 20일부터 이곳에서 구호물자 지급을 시작한다(굿네이버스 후원계좌 우리은행 1005-301-611036, 후원전화 1599-0300, 홈페이지 www.gni.kr).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