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용신] 부끄러움을 드러낸다는 것은
입력 2013-11-19 17:47
정보설득스피치 시간. 한 학생이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어하도록 청중을 설득하겠다고 했다. 그는 세 번의 대학입시 실패와 두 번의 국가고시 실패담을 들려주면서 그로 인한 소심한 성격을 고백했고 그런 자신과 친해질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저와 친해지고 싶다면 저에게 여러분의 치부도 드러내주십시오.” 박수와 웃음으로 교실이 들썩였다.
그리고 이 녀석 때문에 다음 수업 때 치부 하나씩을 이야깃거리로 가져오기로 했다. 처음에는 각종 술버릇, 습관 등이 나왔다. 그러다가 한 학생이 불쑥 자기 동생 이야기를 꺼낸다. 다섯 살 때 병으로 탈모가 와서 그때부터 머리카락이 안 나 지금은 가발을 쓴다는 동생. 어린 시절 동생과 같이 다니기가 창피했다는 것이다. “머리카락 없는 동생이 제 부끄러움이 아니고요, 동생을 부끄러워했던 제가 부끄러워서요.”
머뭇거리던 또 한 학생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법조인의 꿈을 포기하게 됐어요. 가정형편 때문에 로스쿨 진학을 포기했는데 그즈음 여자 친구로부터 이별선고를 받았어요.” 얼마 전 로스쿨 지원 자기소개서를 내밀면서 한번 읽어봐 달라고 했던 학생이다. 불우한 환경에서도 꿈을 위해 노력했던 사정을 알고 있던 터라 가슴이 철렁했다. 평생 처음 자신을 받아줄 것 같은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로부터 거절당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친구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든다. 3일 전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그는 못 먹는 술을 잔뜩 마시고 서럽게 엉엉 울었다고 했다. 산만한 덩치의 이 녀석이 아까 그 녀석한테 다 괜찮아질 거라고 얘기해준다. 아, 이 멋진 녀석들. 그날 나는 힐링을 주제로 하는 어떤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말의 내용은 관계 수준에 따른다. 사이가 가까울수록 더 은밀하고 친밀한 얘기를 나눈다. 누군가 부끄러울 수도 있는 자기 이야기를 터놓았을 때는 ‘이 정도 얘기도 할 수 있을 만큼 너를 친밀하게 생각해’라는 뜻이다. 상대방의 반응이 중요하다.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하면 한 발짝 물러나게 되고 ‘나도 그래’라고 하면 자신도 더 깊은 속내를 드러낸다. 실제로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관계의 친밀성 정도를 확인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한 친구가 부끄러움을 드러냈을 때 꺼내기 힘들었을 속내를 함께 드러내준 아이들이 기특하고 고맙다. 이렇게 서로에게 한 발짝 다가서는 거다.
김용신(CBS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