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편 방대한 분량 신작 시집 ‘무제 시편’ 낸 고은 시인
입력 2013-11-18 18:30 수정 2013-11-18 22:17
폭발하는 창작열의 시인 고은(80)이 올 봄과 여름에 걸쳐 반년 만에 쓴 총 607편의 시를 엮어 신작 시집 ‘무제 시편’(창비)을 냈다. 1016쪽이라는 방대한 분량이다. 수치로 따지면 하루에 3편 꼴로 쏟아낸 셈이다. 시는 그가 올 봄 이탈리아 베네치아 체류를 시작으로, 5월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세계시인대회, 8월엔 중국 칭하이 국제시인대회, 9월엔 22일간 시베리아 열차횡단 등 여행과 체류 사이에서 분출하듯 써졌다.
그는 18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이것은 베네치아에서 보낸 내 80세 전반에 걸쳐 나와 버린 것들”이라며 “시의 유성우가 밤낮을 모르고 퍼부어 내렸다”고 운을 뗐다. “어쩌면 나는 시의 애기이자 시의 유년이지요. 애기가 인생을 모르듯 시와 관련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난 거의 동시적으로 아직도 덜 자란 삶이지요. 전천후라는 게 내 시의 장소가 아닐까요.”
그는 ‘무제 시편’이라는 시집 제목에 대해 “시인은 시의 노예가 아니라 시로부터 해방된 자이기에 나는 시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고 싶고, 시라는 명제를 설정해 그 안에 시를 가둬놓고 싶지 않기에 ‘무제’라고 이름 붙였다”고 말했다.
“시가 시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의 죽음밖에 더 되겠어요? 기호에 대한 부정적 의미가 남발되고 있는 이 시대에 이 기호를 생의 기호로 환원시키고 싶었지요. 시는 본질적으로 무력하고도 강하지요.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이나 릴케나 폴 발레리가 활동하던 20세기 전반기는 시의 황금기였지요. 하지만 수천 년 전 수메르 문명 때부터 시의 영광은 너무도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기에 이 위력이 우리 시대에까지 지속된다면 차라리 철면피한 것이죠. 시의 위력이 무력해진 때에 내가 시인인 게 오히려 축복이지요. 사람들이 시로부터 멀어져도 상관없지요. 난 시를 지키는 사람이고 싶어요. 어떤 끝은 절대 끝이 아니지요.”
남은 생애 동안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시를 기억하고 시를 읽게 만들고 싶다는 그는 “내년에도 독일 베를린, 스위스, 콜롬비아 등에서 열리는 국제문학축전에 초청을 받았지만 그런 초청에 응하다 보면 몸이 찢어지니까 선뜻 응답을 못하고 있다”면서 지난 8월 경기도 안성을 떠나 수원시 광교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긴 소회를 털어 놨다. “광교산은 아주 여성적이고 모성적이지요. 내가 안기는 느낌을 받아요. 6·25 전쟁 당시 한 미군병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나는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태어났는데 내가 한국에서 전사하면 내 죽음의 고향은 한국’이라고. 죽는 장소야말로 진짜 고향일 수도 있다는 말이죠. 우리는 어디로 가든 고향과 같이 가는 것이지요. 우주 도처가 고향이죠.”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