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박광수] 연암 박지원과 로베스피에르
입력 2013-11-18 18:13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시민혁명 직후 공포정치를 주도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지만 그 역시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은 비운의 혁명가다. 무엇이 절대권력을 누리던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렸을까.
시민혁명 직후 어수선한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 로베스피에르는 주요 식료품의 최고가격제를 시행했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가차 없이 처형했다. 현행 가격의 절반 이상을 받지 못하게 하는 최고가격제는 도입 당시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점차 많은 문제점을 노정하게 된다.
우유의 경우 목축업자들은 사료값을 감당하지 못해 우유 생산을 줄였다. 공급 부족으로 우윳값이 폭등하고 암시장이 생겼다. 그러자 로베스피에르는 사료값을 통제했다. 사료업자들이 사료 생산을 중단하자 사료값이 올랐고, 우윳값도 천정부지로 뛰었다. 시민을 위해 추진한 정책이 오히려 시민을 힘들게 만들고, 그마저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시장경제 원리를 무시한 인위적인 가격 통제는 단기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많은 문제를 초래한다. 대표적인 것이 전기요금 정책이다. 정부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해 전기요금을 낮게 규제해 왔다. 이는 1960∼70년대 불모지와 같았던 우리나라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눈부신 산업 발전의 동력이 됐다.
하지만 저가정책의 결과는 어떠한가. 요금 규제로 인한 착시현상과 에너지 상대가격 왜곡으로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추월할 만큼 전력 소비가 급증했다. 또 연료를 전량 수입하는 나라에서 전력을 많이 쓸수록 원가 이하 요금 혜택을 크게 받을 수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낮은 전기요금은 전기 절약에 대한 소비자 의지뿐 아니라 녹색성장 기반을 약화시킨다. 온실가스 감축 의무 부담이 현실화될 경우 전기요금은 반드시 상승하게 돼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미미한 가격 시그널로 인해 소비자는 대처 방법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점진적인 요금 현실화를 통한 가격 시그널을 제공해 미래의 충격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
공기업의 손실 증가나 부채 수준이 자구노력으로 보전할 수 있는 범위를 크게 벗어나 있는 것도 전기요금 저가정책의 문제다. 연료비도 채 회수하지 못해 발생하는 재무구조 악화가 기업 신인도를 하락시키고 자금조달 비용 상승을 초래하고 있다. 한전은 연료비가 급등한 2008년 이후 10조원 이상의 누적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한 투자 위축은 관련 에너지산업의 동반성장 잠재력은 물론 소비자의 장기 편익을 훼손하게 될 것으로 우려된다.
조선 후기 지독한 기근으로 곡물 가격이 폭등하자 조정에서 곡물 가격과 양을 제한하고자 하는 정책을 펼치려고 했다. 하지만 연암 박지원은 이를 반대했다. 쌀값을 통제한다면 이윤이 줄어든 생산업자들이 공급을 줄여 결국 수급 사정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했다. 또 비싼 곡물 가격으로 백성이 일시적으로 고통받기는 하나 그만큼 미래의 기근에 대비하는 지혜가 생긴다고 판단한 것이다. 가격 통제가 가져올 부작용을 미리 꿰뚫어본 것이다.
전력 수급은 국가적인 문제지만 결국 사용 주체는 소비자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소비자에게 시그널이 가지 않으면 이는 죽은 정책과 다름없다. 연료 가격이 상승해도, 환경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도 여전히 낮은 전기요금 정책이 유지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로베스피에르가 아니라 박지원의 통찰력이 아닐까.
박광수 에너지경제연구원·전력정책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