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등기임원 책임 마다하고 권한만 챙기겠다니

입력 2013-11-18 18:05

임원보수 공개 의무화를 담은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오는 29일 시행됨에 따라 해당 회사의 사업보고서가 제출되는 내년 3월이면 등기이사들의 보수가 전부 공개된다. 그런데 일부 재벌총수 및 그 가족들이 의도적으로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고 있어 입법 취지가 무색해지고 있다.

의무화 대상은 연봉 5억원 이상인 등기이사로 제한돼 있어 보수 공개를 꺼리는 일부 재벌총수들의 등기이사직 사퇴가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담철곤 오리온 회장과 부인 이화경 부회장은 지난 14일,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 조정호 메리츠증권 전 회장 등은 올 상반기에 등기이사직을 사퇴했다.

18일 기업경영 평가기관인 CEO스코어가 조사·발표한 바에 따르면 500대 기업 중 연봉 공개 대상은 176개사, 536명인데 이 중 오너 일가가 등기이사로 있는 기업은 96개사, 93명에 불과하다. 회장, 부회장, 고문 등의 직함을 지닌 재벌총수 및 그 일가들이 일찌감치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 있는 모양새다. 예컨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등은 모두 미등기임원이다.

사기업 임원의 보수 공개 의무화에 대해 지나친 규제라는 주장도 있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다고 본다. 임원에 대한 과도하거나 부적절한 보상 플랜은 기업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기에 시장의 감시와 비판을 통해 합리적인 보상체계로 개선된다면 이는 기업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터다.

재벌총수가 미등기임원임을 고집하려는 데는 보수 공개 의무화뿐 아니라 툭하면 불거지는 재벌기업 관련 배임횡령 사건에 휘말리는 사태를 처음부터 차단하려는 노림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대주주의 책임경영과는 거리가 멀고 이사회 경영을 허수아비 꼴로 만드는 것이다.

재벌총수들이 이처럼 권한만 행사하고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행태에 안주하겠다면 다시 법을 바꿔서라도 보수 공개 의무화 대상을 미등기이사로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본다. 사정거리에 못 미치는 법은 개정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