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수민 기자 필리핀 르포] 아들·딸은 끝내 놓쳤지만 남은 가족이라도 살려야
입력 2013-11-19 04:58 수정 2013-11-19 10:47
18일 오후 1시(현지시간) ‘슈퍼태풍’ 하이옌이 할퀴고 간 필리핀 타클로반 인근 바랑가이 94 지역. 레노라 론다(40·여)씨가 딸 위놀린 조이(7)의 손을 잡고 쓸 만한 살림살이를 건지려고 쓰레기가 나뒹구는 진흙탕을 뒤지고 있었다.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한 뼘 높이 콘크리트 벽 외엔 건물 잔해조차 남지 않은 뒤쪽을 가리켰다. 부서진 각목과 녹슨 서랍장, 찌그러진 의자만이 한때 이곳이 론다씨 가족의 터전이었음을 알렸다. 구호단체 굿네이버스 봉사단원들이 론다씨 집터를 살펴보는 동안 바로 옆 웅덩이에서 시체 한 구가 떠올랐다. 맨발로 진흙탕을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시체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론다씨는 지난 8일 태풍에 아홉 살 큰아들과 다섯 살 막내딸을 잃었다. 큰 파도가 잇따라 덮치면서 론다씨는 왼손으로 잡고 있던 아들의 손과 오른손으로 간신히 붙잡은 딸의 소매를 차례로 놓쳤다. 두 아이는 9일과 10일 차례로 시신으로 발견됐다.
살아남은 건 그녀와 남편, 그리고 남편이 안고 있던 둘째 위놀린뿐이다. 론다씨는 “아이들을 지켜야 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히다 이렇게 말했다. “눈앞에 닥친 건 살아남은 이들의 삶이에요. 남은 가족이라도 살려야죠.”
굿네이버스가 3차 구호품 지급 지역으로 바랑가이 94 지역을 선정한 덕에 이곳 605가구 주민들은 이날 처음 구호품을 받았다. 한 가족당 참치 캔 2개, 고열량 비스킷과 가루우유 각 1팩, 쌀 5㎏, 그리고 물 6ℓ가 제공됐다.
인근 실내체육관에는 배급 트럭이 도착하기 전부터 부서진 양동이와 비닐봉투를 들고 찾아온 주민들이 긴 줄을 이뤘다. 무장 경찰이 감시하는 가운데 굿네이버스 직원들은 사전에 나눠준 쿠폰을 확인한 뒤 주민들 손바닥에 할당된 배급품 수를 표기했다.
가장 먼저 배급품을 받은 다니엘 알로토야(78)씨는 “집이 다 부서졌는데 오늘은 열네 식구가 먹을 식량이 생겨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양발에 파란색과 분홍색 슬리퍼를 한 짝씩 신은 매리 노이아(11)양도 고사리손에 아홉 식구 몫의 배급품을 받아들며 “사흘째 밥을 먹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날 굿네이버스가 도착한 타클로반 공항 활주로는 무장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떠나는 사람과 도착한 사람, 각국에서 보내온 구호물자와 수화물이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항공권을 구하지 못한 수백명 주민들은 물자를 내리고 떠나는 수송기에라도 몸을 싣고 탈출하려고 밤새워 노숙을 했다. 기다림엔 기약도, 질서도 없다. 일부 주민들은 상점과 은행을 털었다.
타클로반은 수도와 전기가 끊기며 도시 기능을 상실했다. 사람들은 기름을 사려고 반쯤 부서진 주유소를 둘러싸고 줄을 섰다. 경유값은 ℓ당 40페소에서 150페소로 치솟았다. 쓰레기 범벅인 흙탕물에서 웃통을 벗은 중년 남성이 녹슨 식칼로 돼지고기를 다듬었다. 위생이 걱정됐지만 이 고기를 사려고 사람들은 또 줄을 섰다. 필리핀 정부는 이날 하이옌 사망자가 3681명, 실종자는 1186명이라고 밝혔다.
타클로반=글·사진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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