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형 칼럼] 돈 키호테식 믿음(1) 출정(出征)

입력 2013-11-18 16:59


“세르반테스의 관심은 세상에 있지 않았어요. 하늘에 쌓는 보화로서의 명예심이 그의 궁극적 목표였지요. 작가의 분신인 돈 키호테는 높이 치켜든 창으로 저 먼 곳을 겨누고 있는데, 절대 선을 지향하는 자들에게 ‘안식이나 휴식은 없다’고 말하는 좌우명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돈 키호테, 부딪혔다, 날았다’(비채)를 쓴 작가 서영은의 말이다. 이순(耳順)을 넘긴 작가는 돈 키호테의 땅 라만차 일원을 한 달여간 다니며 책을 썼다. 몇 년 전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유언장 써 놓은 가운데 40여 일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뒤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를 펴낸 서영은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 루타 데 돈 키호테((La Ruta de Don Quijote·돈 키호테의 길)에 올랐던 것 역시 믿음의 대상과의 절절한 만남이 주목적이었다.

책을 읽다보면 위대한 작가 세르반테스가 탄생시킨 돈 키호테가 그야말로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돈 키호테’같은 허무맹랑한 인물이 아니라 절대선, 즉 진리를 향한 끝없는 지향이 있었던 고결한 믿음의 전사(戰士)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에는 허랑한 세월을 보내던 어수룩한 시골귀족이 기사소설의 재미에 푹 빠져 정신이 살짝 돌아버린 나머지 편력기사가 되어 세상을 두루 다니며 불의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무료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던 돈 키호테가 ‘출정(出征)’을 감행한 것이다. 서영은은 그것이 스토리 전개상 만들어 놓은 세르반테스의 재치 있는 상상력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의 메시지는 ‘생의 방향을 돌려놓는 각성(覺省)’이라고 말했다.

그 각성의 결과 돈 키호테는 ‘녹슬고 청태가 가득 낀 칼과 창, 투구를 꺼내어 닦은 뒤’ 기사복장을 하고 말에 올라 세상으로 나간다.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의 내적 동기를 ‘미침’, 혹은 ‘광기’와 연결시킨다. 사실 그 때문에 돈 키호테란 인물이 희화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미침은 정신병리학적 광기가 아닌 ‘의지적 열정’이란 것이 서영은의 해석이다. “이 세상에서 불의를 없애고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의지가 그로 하여금 기사보다 더 기사도 정신에 투철한 ‘기사’로 만들었어요. 돈 키호테는 기사인 척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밑바닥까지 이미 기사인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의의 병기로 바치겠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남들과 똑같이 일생에 매여, 일상의 무료한 삶을 살던 돈 키호테는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을지 모른다. “그래, 이대로 사는 것만이 인생은 결코 아닐 것이야!” 그 각성은 그로 하여금 불멸의 명예, 아무리 빼앗으려 해도 도저히 빼앗길 수 없는 영원한 것을 위한 위대한 모험을 떠나게 만든다. 세상의 중력을 뛰어넘어 출정을 감행한 것이다. 서영은은 말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진정하고 영원한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오른손을 높이 쳐들어야 한다. 우리의 투혼을 불태워 육체와 영혼이 호환하도록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우리 모두 믿음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보이지 않는 대상과의 믿음 생활을 하는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할 최고의 비극은 일생과 일상에 매여 한번도 출정하지 못하고 생을 마치는 것이다. 출정하기 위해선 생의 방향을 일시에 돌려놓는 각성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 녹슬고 있는가. 그것을 꺼내 닦으며 출정 준비를 하자. 진정하고 영원한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 소장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