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하태림 (2) 사고 20일 만에 눈뜨자 “평생 전신마비” 사형선고

입력 2013-11-18 17:25 수정 2013-11-18 21:27


사고 다음날 아침 공사장 인부들이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인근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지만 조그만 동네의원인지라 컴퓨터단층촬영(CT) 장비조차 없어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가장 먼저 달려온 아내와 여동생은 처참한 내 모습에 주저앉았다. 우선 떨어지면서 찢긴 머리와 얼굴의 상처를 대강 꿰맸다. 가족들은 수소문 끝에 나를 CT가 있는 부평의 큰 병원으로 옮겼다.

여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검사가 진행됐다. 머리와 얼굴의 찰과상이 매우 심했고, 두개골이 일부 골절되면서 뇌에 피멍이 들었다. 양팔과 다리는 모두 부러졌다. 가장 심각한 것은 경추(목뼈)와 흉추(등뼈) 요추(허리뼈)가 다 부러진 것이었다. 사고 후 약 20일 만에 눈을 떴다. 온몸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전신에 감각이 없었다.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의식을 찾았으니 치료받고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아내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진도에서 올라오신 어머니는 눈물을 자주 보이셨다. 아내가 물었다. “여보, 당신 몸이 어디까지 회복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 말이 둔기처럼 내 머리를 때렸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오전 8시 회진을 도는 신경외과 과장에게 내가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을지 물었다. 과장은 “열심히 치료하고 있으니 좋아질 것”이라며 대답을 피했다. 다음날도 같은 질문을 했지만 답은 같았다. 1주일째 물어보자 과장은 결심한 듯 “들을 준비가 됐느냐”고 물었다. 심호흡을 했다.

“하태림씨는 현재 전신마비 상태이고, 척추가 다 손상돼 회복이 돼도 걷지는 못할 겁니다. 휠체어도 타지 못하고, 누워서 생활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혼자서는 돌아눕기도 어려울 겁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지만 내 마음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며칠 밤을 새며 고민하다 ‘삶을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아내는 23세. 뱃속에는 8개월 된 태아가 자라고 있었다. 두 살배기 첫째아이는 대구에 사는 작은형에게 맡겨 놓은 상태였다. 뱃속의 아이를 죽일 수는 없었다. 아내에게 “내 몸이 회복돼도 걷지도 서지도 못할 텐데 아이 하나 키우기도 버겁다. 아이를 낳으면 입양시키자”고 했다.

아내는 펄쩍 뛰었다. 부모님과 형제들도 모두 반대했다. 얼마 후 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아들인지 딸인지 묻지도 않았다. 다시 강력하게 입양을 주장했다. 아내와 가족들은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국 아이는 나와 얼굴 한번 마주하지 못하고 입양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좋은 부모 만나서 잘 살도록 빌어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 아이는 내게 가장 큰 아픔이다. 지역아동센터를 세워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자고 결심한 데는 그 아이에 대한 사죄의 의미도 담겨 있다.

아이를 입양 보낸 후에는 아내에게 떠나달라고 부탁했다. “내 곁에 남는다면 평생 병수발 들면서 힘겹게 살아야 해. 아이는 나와 내 가족이 키울 테니 좋은 사람 만나서 새 인생을 살아.” 아내는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온갖 욕설과 고함을 내뱉었다. 보다 못한 장인과 처남이 아내를 데려갔다. 그러나 아내는 사흘 만에 다시 찾아왔다. 제발 가달라고 했다. 한동안 실랑이가 반복됐다. 지친 아내는 결국 내 곁을 떠났다. 막상 현실이 되자 아내에 대한 미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내가 처한 현실에서 아내를 붙잡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라 생각했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