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기독교가 아닌 것은 버려라
입력 2013-11-18 17:24
마태복음 5장 3절
기독교의 시작은 회개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주된 외침이나 예수님의 외침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마 4:17)였습니다. 복음을 들을 때 즉각적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죄의 인식이며, 그 결과 회개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회개는 신앙의 핵심적인 것이므로 회심이나 구원과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보장받은 자들은 전부 이런 저런 죄책감과 두려움을 먼저 가졌습니다. 수가성 여인이 그랬으며 삭개오도 그랬고 바울에게 복음을 받은 빌립보 감옥 간수도 그리하였습니다.
구원의 과정에서 회개는 필수입니다. 산모가 출산할 때 강도는 다르지만 모두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자연인이 다시 태어나 구원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통렬한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결코 구원받은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한국교회는 참으로 참담한 상황입니다. 각 교회는 성도 한 명을 끌어들이려고 안달입니다. 교계 신문에는 30명이 6개월 만에 1000명이 되었다는 성공한 교회의 콘퍼런스를 알리는 광고가 연신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 콘퍼런스에는 수많은 목회자들이 앞 다투어 달려갑니다.
새신자가 교회에 들어오게 하려고 이들에게 최대한 부담감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새신자 또는 불신자들에게 어색한 것은 모조리 보이지 않게 합니다. 그들이 목사 가운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벗어 버립니다. 헌금을 강조하는 것 같다고 하면 헌금주머니를 돌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인들에게 예절교육을 받게 합니다.
이들이 예절교육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목사는 성직자의 모습을 최대한 감추고 기업체의 과장과 같이 행동합니다. 교회 건물도 가급적이면 교회처럼 만들지 않고 십자가만 없다면 일반 건물과 비슷하게 만듭니다. 백화점은 ‘고객이 왕’이지만 교회는 ‘교인이 왕’입니다. 백화점 점원은 진상 고객일지라도 쩔쩔매며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처럼 교회의 사역자들은 온갖 진상 교인들에게 쩔쩔맵니다. 혹시라도 교인 떨어질까 안절부절 못합니다.
교회는 온갖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강좌를 열어 놓습니다. 사람들이 좋다고만 한다면 심지어 요가 강좌까지 열어 놓습니다. 목사와 사역자는 언제나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부흥하기 때문이라 생각해서입니다. 바로 이런 교회에서 세례요한이나 우리 주님처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며 벼락같이 불호령을 떨어뜨릴 수 있을까요. 각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은근히 감춰둔 죄를 꼬치꼬치 따지고 들어가 결국 다 까발려서 “당신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이제 아셨지요?”라고 그의 내면을 스스로 목격하게 할 수 있을까요.
많은 교회들은 이미 이런 것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죄책감도 없고 회개가 없게 됩니다. 회개가 없으니 구원도 없습니다. 심령이 탄식하고 가난해져야 회개가 되는데 심령이 부유해지니 누가 땅바닥에 뒹굴며 통곡하며 회개하겠습니까.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우리들의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심판장으로 오실 예수님을 대면할 때 무슨 말로 변명할 것입니까. 우리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역자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정대운 목사 (삼송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