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길 찾는 사내 그가 그리는 이상과 현실… 한국화가 박병춘 개인전 ‘길을 묻다’

입력 2013-11-18 16:59


한국화가 박병춘(47·덕성여대 동양화과 교수)이 다시 길을 나섰다. 홍익대를 나와 지난 20년 동안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며 한국화의 새로운 실험을 모색해온 그는 지난해 안식년을 맞아 세계여행을 떠났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10년을 열어가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그 결과물을 ‘박병춘: 길을 묻다’라는 타이틀로 내년 1월 5일까지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02-737-7650)에서 펼쳐 보인다.

성곡미술관이 당대 허리세대 작가를 조명하고자 2009년부터 이어온 ‘중견중진작가 집중조명 전’으로, 박병춘의 반(半) 회고전 형식의 전시다. 작가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며 창작 실험에 열을 올렸던 대학·대학원 시절의 미공개작과 새로운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최근작 등 66점을 선보인다. 삶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전하는 작품들은 현실을 바탕으로 한 회화의 맛을 선사한다.

박병춘 만큼 전국 방방곡곡을 발로 뛰며 사생을 많이 한 작가도 드물다. 언제 어디서나 붓을 꺼내들고 자연의 숨소리와 표정을 스케치했다. 풍경을 단순히 화면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검정고무판을 가늘게 잘라 산과 강을 표현한 ‘고무산수’, 꼬불꼬불한 라면가락을 활용한 ‘라면산수’, 칠판에 분필로 그린 ‘분필산수’ 등을 시도했다. 이는 ‘박병춘식 산수풍경’ ‘병춘준(峻·암석 표현법)’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화에 대한 열정은 젊은 시절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1988년부터 90년대 말까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자 무명화가로서 밤늦게까지 ‘알바’를 뛰어야 했다. 굵고 검은 먹과 원색의 아크릴 물감, 목탄, 파스텔 등 재료를 거침없이 사용하며 인간의 본능과 욕망, 사회문제, 가족, 삶의 풍경 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때로는 자유분방하게, 때로는 절박한 심정으로 화폭에 쏟아냈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어느 교수님이 ‘네 그림은 쓰레기야’라고 말할 정도로 대담하고 솔직하게 표현했었다”며 “작업이 너무 직선적이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지만 내면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듯 붓질하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런 치열함이 있었기에 2000년 이후 ‘기억의 풍경’ ‘흐르는 풍경’ ‘낯선 풍경’ ‘채집된 산수’ 등 대중성을 확보한 연작이 나올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돌기둥이 수직으로 늘어선 인도의 ‘함피’라는 화산지역을 네 차례 여행하며 그곳의 독특한 지형을 표현한 미공개 신작이 소개된다. 오랜 시간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던 서울 수색 작업실을 떠나 얼마 전 경기도 의정부로 옮긴 작가는 작업실 옆 단풍나무를 뿌리째 뽑아 전시장 천장에 거꾸로 매달았다. 새로운 출발에 대한 결의를 다지는 설치작품이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의 갤러리 이레(031-941-4115)에서도 ‘세상의 길을 걷다’라는 타이틀로 다음 달 5일까지 개인전을 연다. 유럽 풍경을 화사하게 채색한 80여점이 출품된다. 그는 “앞으로는 유화 물감도 쓸 것이다. 동양의 붓으로 서양의 물감을 칠하니 글로벌한 작품이 아니냐”며 웃었다. 신작들은 다소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느낌이 들지만 박병춘만이 감행할 수 있는 실험임에 틀림없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