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정기] 보는 것을 믿는 시대의 영화

입력 2013-11-17 18:33


1000만명급 관객 영화가 이어지고, 총 관객 1억명 돌파의 경사 속에서 영화상 심사 참여는 모처럼 호기심 ‘만땅’이었다. 그러나 자질이 부족한 심사자임을 자각했다. 시도 때도 없는 난도질, 깡패들이 찌르고 또 찌르고, 야구배트로는 치고 또 쳐서 생명을 시체로 만든다. 잔혹함 속에서 사람 목숨은 그야말로 껌값도 못된다. 착잡했다. 좋은 영화를 만나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대세는 깡패영화와 폭력이었다. 눈을 감거나 손가락 틈새로 보기도 했다. 영화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해야 할 심사자로서는 엉터리 자세였다. 할리우드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대한민국 영화 실력으로 생생하게 표현되는 가공할 폭력, 그러나 필연성도 없고 예술적이지도 못한 폭력 쓰나미에 분노감이 일었다.

사라지는 현실과 영화의 경계

심사 뒤엔 후유증에 시달렸다. 밤길 귀갓길에서 뒤를 힐끔힐끔 보았다. 잘 차려입은 건장한 남성들이 모여 수군거리면 영화 속 깡패들이 떠올랐다. 계단을 내려오는 좀 큰 가방을 보면 저 안에 무엇이 들었을까 하는 의혹도 일고, 야구배트를 보면 무엇에 쓰려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증상에 내심 실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영상미디어의 영향력을 새삼 느꼈다. 미디어의 영상 콘텐츠를 인간의 오감에 더욱 어필할 수 있도록 제작할 수 있는 기술 발달이 영화적 세계와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의 경계를 없애고 있음을 실감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기초하여 세상을 인식하며, 이러한 인식은 세상에 대한 해석과 추정의 토대인 신념을 형성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보면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고, 그 믿음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것이므로 실재하는 사실로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건, 현상에 대해 보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 Berger).

장만위(張曼玉)와 량차오웨이(梁朝偉)의 애잔한 사랑을 담은 ‘화양연가’. 멜로 장르의 전형적인 설정으로 좋은 영화의 입지조건을 지니지는 못했다. 그러나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은 사람과 공간에 대한 인과관계적 설명의 생략을 통해 형성한 모호성, 앵글과 복합적인 장면에 의해 창조한 몽환성, 멜로 장르에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기조와 잦은 슬로모션 구사에 의한 고도의 추상성을 가미해 최고의 ‘아방가르드 멜로 드라마’를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현대 영화의 은밀한 매력’, 최인규). 영화 ‘닥터 지바고’는 원 소설에서 맛볼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다. 지바고가 인간을 파괴하는 공산주의 이념을 피해 찾은 바리키노의 겨울, 눈 덮인 설원과 새벽 창에 하얗게 얼어 붙어 있던 서리를 보여주는 생생한 미시적 장면과 거시적 상징성은 다른 매체는 성취할 수 없는 영화적 소통을 보여준다.

좋은 영화란 어떤 것일까? 장면을 따라 관객을 희로애락애오욕하게 하는 콘텐츠 능력, 전복과 반전의 스릴러, 카메라워크가 아름다운 SF, 애잔한 감동으로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멜로 드라마, 사회의 불합리한 현실을 예술적으로 보여주는 영상. 그러나 어려운 질문이다.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하는 문제이므로 객관적인 정답이 있을 순 없다.

폭력영화는 그만 만들어야

좋지 않은 영화는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은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엉터리 자세를 자주 취한 심사위원이었지만 분명한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비열한 깡패무리들이 칼과 피로 벌이는 폭력의 나열은 좋지 않은 영화다. 고정관념에 대한 재해석도, 현실과 미래에 대한 비전도,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적 재미도, 삶의 애환과 향기도 없는 폭력영화는 마감해야 한다. 영화 마케팅을 독점하고 있는 배급사의 횡포와 요즘 관객이 자극적인 것을 원해서 만든다는 변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영화계의 실력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그런 악순환을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정기 (한양대 교수·언론정보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