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갑자기 들이닥친 통일… 겨를이 없었다

입력 2013-11-17 17:19


독일 통일은 갑자기 들이닥쳤다. 서독과 동독의 통일은 시간을 오래 두고 단계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닌 급진적 통일이었다. 동독 주민들의 탈출이 본격화되고 실제 독일 통일을 선포하기까지 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사진) 통일 독일을 대내외에 선포하기까지 걸린 기간은 329일에 불과했던 것이다.

1989년 말 동독에서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주민들의 대규모 탈출이 이어지자 서독 정부는 동독에 잇따른 개혁조치를 요구했다. 그해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는 자신의 통일정책을 수정한다. 그는 당초 독일 안정을 최우선에 뒀지만 1990년 2월 조기통일정책으로 수정한 것이다. 당시 독일인의 운명은 독일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자결권’을 인정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결정, 통일 독일의 초대 총리가 되려는 콜 자신의 개인적 야망이 더해진 결과다.

이후 서독 정부는 동독에 자유선거를 치를 것을 요구했고, 동독 정부는 당초 1990년 5월로 예정됐던 총선을 3월로 앞당기는 등 성의를 보였다. 동독 총선에선 서독 마르크화 도입과 조기 통일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독일연합이 승리했다. 그 결과 동독 내에서도 조속한 화폐 통합, 속전속결식 통일론이 힘을 얻었다.

이후 동·서독 간 통합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90년 5월 동·서독은 경제·사회적 통합에 대한 국가조약에 서명했다. 서독 마르크화와 동독 마르크화의 1대 1 교환으로 대표되는 역사적인 경제·사회 통합은 7월 1일 이뤄졌다. 동·서독은 먼저 경제 개혁을 이루고 화폐통합은 나중에 한다는 단계적 통합방안도 검토했지만 기간이 오래 걸릴 경우 사회 혼란이 더욱 커질 것을 우려해 조기통합을 밀어붙인 것이다. 동독 주민들의 서독 체류 폭증, 동독 마르크화 가치 폭락 등도 주 요인이 됐다.

정치통합도 마찬가지였다. 독일 내부적으로는 수차례 협상을 통해 동독이 서독에 편입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서방 선진국들은 소련을 설득했다. 소련이 서방국들로부터 대규모 경제지원을 받는 대가로 통일 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편입을 수락하도록 했던 것이다.

남혁상 기자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