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하태림 (1) 스물다섯에 닥친 1급 지체장애 “주여 왜 나를?”

입력 2013-11-17 18:59


지난달 28일 서울시청 신청사에서 열린 2013년 서울시 봉사상 시상식. 대상 수상자로 내 이름이 호명됐다. “하태림씨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병원에서 십수년간 봉사활동을 하며 1000여명의 환자를 돌봤고, 지역아동센터를 세워 어려운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는 공로를 인정받아 대상을 받게 되셨습니다.”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가 마이크를 타고 행사장 내에 울렸다. 그중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절뚝거리며 단상을 오르는 내 모습에 시선이 쏠렸다. 나는 지체장애 1급 장애인이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기온이 내려갈수록 걷는 것은 물론 서 있는 것조차 버겁다. 차가운 날씨에 수축된 근육이 어긋나 있는 척추를 누르기 때문이다. 의사는 지금도 “누가 뒤통수를 세게 때리기만 해도 척추가 무너져내릴 수 있다”며 척추 뒤에 철판을 대는 수술을 하자고 제안한다. 장애는 척추뿐이 아니다. 왼손은 제대로 펴지지도 접히지도 않는다. 남들은 날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장애를 입은 초기에는 장애인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확산되기 이전이라 날 조롱하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난 평생 장애를 안고 가야 한다. 그러나 이런 삶조차 하나님께 간구함 끝에 기적같이 허락받았기에 감사한 마음뿐이다.

건강했던 모습이 언제였는지 아스라하지만 나는 선천적 장애인은 아니다. 나는 1964년 전남 진도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농사를 짓던 우리 집은 진도에서 비교적 풍족한 편이었다. 경제적으로 부족한 것은 없었고, 일상은 무료할 지경이었다. 잔잔한 호수 같던 우리 집에 돌이 던져진 것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큰형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당시 형은 20대 중반이었다. 자살의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아들의 죽음은 어머니를 교회로 이끌었다. 당시 인천순복음교회에 다니던 사촌누나가 내려와 식음을 전폐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교회에 나갈 것을 권했다. 위로가 필요했던 어머니는 교회로 향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어머니는 아픔에서 점차 회복됐다. 어머니는 가족 모두가 교회에 나가기를 바랐다. 가정의 평화를 깨트리기 싫어 처음으로 교회에 나갔다. 하지만 억지로 나간 터라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젊은이들은 일을 찾아 도시로 떠났고, 나 역시 고등학교 졸업 후 사촌누나가 있는 인천 부평으로 올라와 건설회사에 취직했다. 고등학교 후배였던 여성과 연애를 시작했고, 1985년 우리는 결혼식 없이 혼인신고를 하고 동거를 시작했다. 당시 내 나이 스물둘, 아내는 스물.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월급을 조금씩 모아가며 내집 마련을 꿈꾸는 삶이 행복했다. 다음해 태어난 딸은 우리 부부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평범했던 삶의 궤적이 180도 바뀐 것은 88년 가을이다. 단풍구경도 할 겸 친구들과 동네 산으로 놀러갔다가 어둑해질 무렵 내려왔다. 어느 정도 술에 취한 상태였다. 친구들과 헤어진 뒤 소변이 마려워 외진 곳을 찾아 도로가로 갔다. 그 순간 발밑이 푹 꺼졌다. ‘쿵’ 소리와 함께 5m 아래로 떨어졌다. 누군가 공사를 하기 위해 땅을 깊게 파 놓은 것. 시간은 늦었고, 외진 곳이라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발견 당시 내 얼굴과 머리는 피투성이였고 경추와 중추, 요추는 부서져 있었다. 인생에 암흑이 찾아왔다.

하태림 목사 약력=1964년 전남 진도 출생, 진도실업고등학교 졸업, 총회신학교·대학원 졸업(예장 합동 보수), 고려대 안암병원 원목, 이레지역아동센터 대표, 2013년 서울시 봉사상 대상 수상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