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조성수 남아共 선교사] 생활비는 자비량으로, 후원금은 사역에

입력 2013-11-17 16:56


15㎞ 이상 걸어 학교 오는 흑인학생들과 같이 살 궁리 끝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 비록 작은 사람들이지만 삶 전체를 통해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소원하던 사람들, 비전은 뚜렷했지만 가난하고 힘이 없어 혼자서는 그 구원받은 감격을 어떻게 잘 나타내기도 어렵고 더욱이 주님께 효과적으로 쓰임 받는 자리에 서기가 쉽지 않았던 젊은 사람들과 함께 20대 후반에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그렇게 모인 사람들 중 일부는 해외 선교의 부르심을 받고 이 나라 저 나라로 파송됐습니다.

저희 부부는 비록 아무 기술을 갖지 못했으나 같은 구성원으로 공동생활을 해 온 덕분에 아프리카 땅의 한 구석에서 살게 됐습니다. 보츠와나에서도 공동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끼리만 살던 공동생활에 흑인들이 함께하게 된 것 외에 공동생활의 틀은 같았습니다.

내게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이 메워주고 다른 사람이 못하는 것을 내가 도울 수 있는 공동생활은 분명 유익했지만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매일 끼니를 거르지는 않았지만 음식이 부족할 때가 많았습니다. 어린 자녀와 함께 있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성장하는 자녀들과 대화하며 가족끼리 오붓하게 지내는 시간도 많이 갖고 싶었습니다.

다시 공동생활

남아공에서의 처음 몇 년은 고인이 된 흑인 목사의 요청으로 성경공부를 돕는 사역을 했습니다. 이렇다 할 신학 과정 없이 목회를 하게 된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작은 학교 건물에서 몇몇 흑인 신학생과 함께 성경공부를 했는데 이들은 거의 매번 정해진 수업시간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공부에 성의가 없어 보이고 성경학교를 소홀히 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점심시간이 가까워오면 늘 약한 모습을 보이며 배고파했습니다. 화가 나곤 했지만 조금씩 오해가 풀렸습니다. 이 친구들은 교통비가 없어 자신들의 마을에서 최소 15㎞ 이상을 걸어 학교로 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아침을 거르고 오다 보니 당연히 일찍 배가 고픈 것이었습니다. 이런 형편을 알게 되니 공동생활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어 보였습니다.

손에 쥔 것은 없었지만 여럿이 같이 살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오랜 시간, 우여곡절 끝에 근사한 곳을 찾았습니다. 50명쯤 같이 살면 좋겠다고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전에 호텔로 사용되던 곳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곳은 100여명은 편하게 지낼 수 있고, 부속시설도 잘 돼 있었습니다. 39만6000여㎡(약 12만평)의 널찍한 땅이었습니다.

이런 좋은 곳에서 지낼 만한 능력이나 기반은 없었지만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20대 때 했던 공동생활을 다시 선교지에서 시작하려는 그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쁘게 봐주셨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친분이 깊은 한 선교사가 이런 공동생활에 대해 격려해주던 말이 기억납니다. “구원받을 수 있게 불러주시고 목회자로 불러주신 뒤 선교사로 인도해 주셨는데 이제 공동생활까지 허락해주시니….”

힘들 때마다 이 말이 생각나곤 했습니다.

이 넓은 땅을 관리하는 것보다 이곳 사람들의 영혼을 살찌우게 하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앞으로 이곳의 어린 친구들과 함께 살면서 이들 중에 잘 훈련된 흑인 목회자들이 나오기를 소원합니다. 여전히 부족한 게 많지만 12년 다 되도록 이런 마음을 간직하고 사역하려고 늘 기도합니다.

후원금으로 이 센터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것은 온당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럴 만큼의 후원금도 들어오지 않았지만요. 이 센터의 절반 정도를 1년쯤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준 적도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수입이 생겨 적지 않은 힘이 됐습니다. 덕분에 센터 안에 예배당을 지을 여력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 센터를 빌려주는 일을 반대하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를 성령의 음성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센터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을 뿐 아니라 선교 사역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두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어린 친구들을 돕기 위해 사립초등학교를 세워 이곳 정부에 등록했습니다. 학교에 오는 어린이들을 모두 배 아파서 낳은 귀한 자녀와 같이 여기려고 노력하며 사역합니다. 이 어린 학생들을 돌보는 보람이 무엇보다 크지만 학부모들과 교제하는 일도 즐겁습니다. 교제 폭을 넓히면서 여러 마을에서 만난 젊은 일꾼들을 예수님의 자녀로 성장시키는 일도 큰 기쁨입니다.

30대 초반의 선교사님들과 주님 안에서 만난 선교사 자녀들은 이 학교를 운영하고 그 기초를 다듬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물론 학교 운영뿐 아니라 백인 선생님들과 관리자들의 월급을 주는 것이 수월하지는 않습니다. 이곳의 정부 담당자들이 까다롭게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을 이행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루하루 지나가면서 조금씩 배우는 게 있습니다. 조금씩 재정적으로도 나아지면 이곳 젊은 선교사들의 목표도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됩니다. 그것은 바로 ‘생활비는 자비량으로, 후원금은 온전히 사역에’라는 목표입니다.

생활비는 자비량으로 후원금은 사역에

선교지마다 제각각 특색이 있고 형편도 다릅니다. 물론 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도 저마다 형편이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립초등학교 사역을 통해 생활비를 온전히 자비량으로 충당하게 될 것이라고 기도합니다.

그날을 위해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 주님 안에서 함께 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주님이 원하시는 학교다운 학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느 학생이 다른 학생보다 영어나 수학에서 혹은 다른 과목에서 월등한 실력을 보이도록 하는 특별한 존재를 키우는 교육이 아닙니다. 모두가 대통령, 법관이나 의사가 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태초 이전부터 한 영혼 한 영혼 선택하시며 하나의 귀중한 존재로 지으시고 이 땅에 특별히 주신 은사들을 통해 영원토록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들의 은사를 발견케 해 주는 학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행복하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끔 돕고 싶습니다.

둘째, 매일매일 주어지는 날들을 주님 안에서 성실하게 보내면서 함께 생활하는 선교사들에게 급여(?)를 책정했는데 검소하게 생활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으로 정했습니다.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공동생활을 하기 때문에 집세 전기세 식사비 등에 대한 부담이 없기 때문입니다.

후원금을 온전히 이 지역 영혼들을 살리는 사역에 쓰기 위해 이런 원칙들을 세웠습니다.

자비량으로 사역하신 것뿐 아니라 평생 오직 선교 열정 하나에만 몰입하신 바울 선생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사역하고 뜨겁게 기도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삶의 무게를 감당했고 앞으로도 그 무게가 만만치 않을지라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이 마음을 갖고 사역하려고 합니다.

바울 선생님의 사역을 가슴에 새기면서, 한국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서 만나는 흑인들을 주님 앞에 부르는 선교사들이 되겠습니다. “…아굴라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행18:2∼3)

● 조성수 선교사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 소속 선교사, GP선교회 협력선교사

△1956년생. 84년 성결대 신학과 졸업

△87년부터 5년간 보츠와나에서 사역

△95년부터 ‘월간 한국인 선교사’ 편집인

△99년부터 남아공 루스텐버그에서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