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3부) 한국,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다] (33) 통독 부작용 줄인 지속적 교류
입력 2013-11-17 17:19
동·서독 인적 문화교류 어떻게 했나
남북한과 동·서독이 가장 달랐던 점은 서로의 왕래가 끊임없이 지속됐다는 점이다. 서독 주민들의 동독 여행은 자유로웠고, 동독 주민의 서독 방문도 비록 제한적이긴 했지만 가능했다. 동·서독 간 거주지 이전도 일정 범위 내에서 허용됐다. 이는 인도적 지원과 문제 해결을 최우선한다는 서독 정부의 정책과 인도적 사안에 대해선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하고 경제적 이득을 취한 동독 정부 간 합작의 결과였다.
#가족 생사는 알 수 있었던 동·서독 이산가족
서독 주민의 동독 방문은 분단 후 활발히 진행됐지만 1961년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고 국경선 검문을 강화하면서 단절됐다. 그러나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서베를린 시장으로 있던 시절인 1963년 서베를린과 동독 간 출입증명서에 관한 합의가 체결되며 대 전환점을 맞았다. 서베를린 주민이 공휴일 낮 시간, 가족 문제(출산·결혼·중병·사망)가 있을 때 동독 지역 방문이 허용됐기 때문이었다. 이후 동독은 경제적 효과를 얻기 위해 서독 주민의 방문을 대폭 허용했다. 동독을 방문하는 서독 주민들이 체류 일수에 따라 서독 마르크와 동독 마르크를 1대 1 환율로 적용해 일정금액의 동독 마르크화를 의무적으로 환전하게 했다. 이에 1967년부터 1971년까지는 연간 최대 200만명의 서독 주민들이 동독 지역을 방문했다. 당시 서독 주민은 1년에 30일 동독에 체류할 수 있었다. 또 브란트 전 총리가 총리로 재직하던 1972년 동·서독 간 통행에 관한 조약이 발효됨에 따라 동독에 친척이 있는 사람뿐 아니라 지인이 있는 사람들도 방문이 가능해졌다.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연간 500만∼750만명이 동독지역을 방문했다. 동독 주민은 1963년부터 연금수령자에 한해 연간 4주간 서독의 친·인척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이에 매년 100만명 이상의 연금수령자들이 서독의 친·인척을 방문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공짜가 아니었다. 서독은 서독 국민이 동독을 통과하는 대가로 매년 엄청난 거액의 통과료를 지급했다. 실제 1989년 서독은 통과료로 5억2500만 마르크(약 4000억원)를 동독에 보냈다.
#서신 교환·전화도 가능했던 동·서독
동·서독 간 우편 교류는 완전히 단절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실제 서독에서 동독으로 보낸 편지는 1965년 3억8000만건이나 됐다. 동독이 우편 교류를 막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서독이 이에 대한 대가를 지급했기 때문이었다. 서독은 동독에 서신 교환을 위해 매년 우편일괄금을 지급했다. 서독에서 동독으로 향하는 우편과 통신 교류량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일괄적으로 돈을 지급한 것이다. 우편일괄금은 통일 직전인 1990년에는 무려 2000만 마르크나 됐다.
전화도 자유로웠다. 1970년까지 동·서독 간 전화 회선은 34회선이었으며 모두 수동식 교환 방식이었다. 그러나 동방정책(Ostpolitik) 추진으로 점차 개선됐다. 1971년 284회선, 1979년 1061회선, 1988년에는 1529회선으로 늘어났다. 수동식 교환방식도 점차적으로 반자동식 또는 자동식으로 변경됐다. 이에 따라 서독 주민은 집안에서나 공중전화로 동독 친지들에게 자유로운 통화가 가능했다. 당시 서독 정부의 집계에 따르면 서독에서 동독으로 걸려간 전화는 1987년 3500여만번, 1988년에는 4000여만번이나 됐다.
#집에서 서독 TV를 마음껏 시청한 동독 주민
당초 동독 정부는 1971년까지 동독 주민의 서독 TV 시청을 금지했다. 1953년 6월 발생한 대규모 동베를린 시위가 서독 리아스(RIAS) 라디오 방송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브란트 전 총리가 동방정책을 밀고 나간 1970년대부터 동독은 주민들의 서독 TV 시청을 묵인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서독 TV는 PAL, 동독은 SECOM 방식이었지만 주사선이 동일해 상대편 방송을 컬러로는 볼 수 없어도 음성이나 흑백영상은 그대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북의 경우 남한은 NTSC 방식, 북한은 PAL 방식으로 주사선 숫자가 달라 전혀 호환이 되지 않는 것과 달랐다. 이에 동독 정부는 실효성 없는 서독방송 청취 금지를 고수하는 것보다는 이를 묵인, 국내외에 자신감을 과시하고 독립국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통일이 되기 직전 동독 지역에선 2개 채널의 동독 방송과 3개 채널을 가지고 있는 서독 방송을 TV에서 볼 수 있었다. 당시 올림픽이나 분데스리가 축구가 열릴 때면 동·서베를린이 이미 통일됐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동독 정부의 바람과 달리 동독 주민들은 서독의 대중매체를 통해 정보를 직접 얻을 수 있었고, 점차적으로 동독 매체의 정보를 신뢰하지 않게 됐다. 동독 주민들은 TV를 통해 서독이 보다 자유롭고 풍요한 생활을 향유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동경했다. 결국 서독 TV 시청은 1980년대 말 동독 시위를 확산시키고 통일 열기를 높이는 촉매제 역할을 하며 독일 통일을 앞당겼다는 평가다.
베를린=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