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군기 오르며 ‘지옥 탈출’ 실감…比 태풍 피해 교민 탈출 현장

입력 2013-11-15 22:46


“국민 여러분, 타클로반에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한민국은 여러분을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기장의 한국어 음성이 나오자 C-130 수송기에 타고 있던 40여명의 한국인들이 박수를 쳤다. 15일 오후 ‘대한민국 공군’이라고 선명하게 새겨진 수송기 2대가 필리핀 타클로반 공항에 착륙했다. 비상식량과 의료기기, 방역장비, 그리고 40여명의 한국 정부 긴급구호팀이 내린 뒤 다시 김병호씨 등 교민 11명과 조현삼(54) 목사를 단장으로 한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원 등 40여명을 태우고 급히 이륙했다. 이내 창 밖으로 태평양이 펼쳐졌다. 수백만명의 삶을 파괴했던 태풍과 해일을 일으켰던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했다. 수송기는 40여분 만에 세부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타클로반의 한국인 교민을 탈출시키기 위한 작전은 전날 밤 10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4일 오후 4시 세부에서 출발해 이곳에 도착하기로 했던 한국 공군수송기가 30분 동안 타클로반 상공을 선회하다 끝내 비좁은 공항에 내려앉지 못하고 돌아간 뒤였다. 이미 하늘이 어두워져 공항 밖으로 빠져나가기엔 위험한 상황이었다. 교민들은 다음날 돌아올 공군기를 기다리며 공항에서 노숙을 하기로 했다.

“마닐라로 가실 분들은 당장 나오세요!”

밤늦게 황성운(45) 참사관이 외쳤다. 콘크리트 바닥에 누웠던 이들이 선잠을 깼다. 황 참사관이 야간에 착륙한 미군수송기 MC-130의 조종사를 찾아가, 마닐라로 가는 수송기에 한국인을 태워주기로 허락을 받은 것.

한명학(67)씨와 사공세현(41)·박노헌(45) 목사 가족 11명이 서둘러 짐을 들었다. 미군 수송기가 어두운 공항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한국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미군수송기로 달려가는 순간 밤하늘에서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현장에 있던 취재진들이 몰려들었다. 공항에서 며칠째 비행기를 기다리던 타클로반 시민 1000여명도 그 장면을 보고 공항 주기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공항 안에서 대혼란이 빚어질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필리핀 군인들이 다급하게 달려와 시민들을 가로막았다. 미군 장교들은 “한국인만 오라”고 고함을 쳤다.

미군은 결국 황 참사관에게서 11명을 인수 받아 수송기 가장 안쪽에 태운 뒤 100여명의 필리핀인을 더 태웠다. 한차례 수송기를 갈아타는 소동을 겪은 뒤 밤 12시가 넘어 비행기는 활주로를 떠나 마닐라로 향했다.

외교통상부 긴급대응팀은 아직 연락이 닿지 않은 교민 6명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타클로반 시내로 달려갔다.

타클로반 공항에는 1만여명의 시민들이 몰려와 무작정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프레드 로무알로스 타클로반 시장이 “섬을 빠져나갈 사람은 나가라”고 말한 뒤 더 많은 이들이 공항과 항구로 향했다. 15일에도 공항에는 아침 일찍 필리핀 공군수송기 2대와 미군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를 비롯해 수많은 비행기와 헬기가 오르내리며 구호품을 내려놓고 시민들을 태웠다. 세부에는 이미 3000여명의 타클로반 시민들이 빠져나와 이곳에도 임시대피소가 만들어졌다. 필리핀 정부는 앞으로 6개월 동안 태풍 이재민들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세부=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