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청소년들의 엄마 전귀선 집사… 남편·아들 데려가시더니 더많은 가족 주셨어요

입력 2013-11-15 17:29 수정 2013-11-15 19:01


그는 매년 추수감사절이 되면 ‘영혼추수’ 점검에 나선다. 올해는 몇 명을 하나님께 인도했나, 믿음을 좀 더 키운 아이는 몇 명이지? 그렇게 한해를 돌아보며 “하나님, 올해는 이 정도밖에 못 거둬 죄송해요”라고 회개한다. 그럼 이런저런 감사할 것들이 떠오른다. “장애를 가진 몸으로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손으로 만든 요리로 대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많은 아들, 딸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귀선(49·부산 순복음안락교회) 집사는 10년 넘게 방황하는 청소년들의 엄마로 살고 있다. 남편과 아들을 사고로 잃었지만 고난이 그를 삼키지 못했다. 교회학교 학생들과 가출 청소년들에게 ‘집밥’을 해먹이며 새 가족을 만들고 있는 그에게 “고난 속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주님 안에선 ‘무한감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지난 7일 부산시 안락동 자택에서 전 집사를 만나 그의 무한감사 이야기를 들어봤다.

불편한 다리가 보물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밖에서 잡숫는 것보다 집밥이 낫다”며 늦은 점심상을 차렸다. 어묵탕에 담백한 나물, 묵무침, 깻잎절임, 고슬고슬한 잡곡밥. 언제나 집을 찾는 손님에게 이렇게 대접한다는 그의 주방은 먹거리로 가득했다. 바쁜 그에게 “몸이 불편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오른 다리는 흉터투성이예요. 그런 불편한 다리가 제겐 보물입니다. 이 다리 때문에 남편을 만났고, 가족이 믿음 안에서 설 수 있었거든요. 또 이 다리를 하고 하나님을 선포하러 다닙니다.” 처음부터 그 다리가 보물이었던 건 아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거제도 친척집에 놀러갔다가 심하게 열병을 앓았다. 섬에서 뭍으로 제때 빠져나오지 못해 치료시기를 놓쳐 오른쪽 다리를 못 쓰게 됐다. 딸의 다리를 고쳐보려고 부모는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집안은 기울고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부산여상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이력서를 낸 은행들마다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불편한 다리 때문이다. 그때는 다리가 짐짝이었다. 앞길을 막는 원흉. 이 다리를 하고 어찌 살아갈지 막막했다. 그러다 새마을금고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남편 김평철 집사를 만났다. 문을 열고 불쑥 들어와 길을 물었다. 이후 몇 차례 더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다. 알고 보니 동네 하숙집에 살고 있었다. 자꾸 보니 정 들었다. 그의 나이 스물둘, 남편은 스물일곱. 두 사람은 결혼했다. “비장애인과의 결혼은 꿈꿔본 적 없다”는 아내를 남편은 진심으로 사랑했다.

‘믿음의 반석’ 남편, 먼저 떠나다

결혼하고 1989년쯤 앞집 아주머니의 전도를 받았다. “교회에서 잔치를 하는데, 초청받은 사람은 한복을 입고 와야 한다”고 아주머니는 당부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예배당 맨 앞줄에 앉았다. 그리고 그날 하나님을 만났다. 남편은 반대했다. “나는 내 주먹을 믿지, 예수는 안 믿는다”고 했다. 처음엔 혼자라도 신앙생활을 하는 게 감사했지만 남편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를 전도하기 위해 2년 넘게 정성을 다해 섬겼다.

남편의 마음을 움직인 계기가 있었다. 어렵게 낳은 아들 정수는 조금만 뛰어도 기침을 하느라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급기야 네 살 때 폐 수술 진단을 받았다. 수술 날짜를 잡아놓고 기다리는데, 당시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부산에서 집회를 연다고 했다.

남편을 설득해 아들과 함께 참석했다. 신유의 시간. 아들 가슴에 두 손을 얹고 기도했다. 갑자기 몇 만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그의 몸이 뜨거워졌다. “우리 아들 치료받았다. 할렐루야!” 그는 외쳤다. 다시 폐 촬영을 했는데 깨끗했다. 이후로 아들은 한번도 기침을 하지 않았고 남편 역시 교회에 나왔다.

남편은 충성된 청지기였다. 교회 식당 하수구 청소부터 교회학교 차량 봉사, 음향기기 점검 등에 이르기까지 교회에서 그의 손길이 안 닿는 데가 없을 정도였다. 100% 말씀에도 순종했다. 소년원에서 나와 오갈 데 없는 아이를 데려다가 건축 기술을 가르치며 석 달을 같이 살았다. 하지만 아이는 부부가 집을 비운 새 패물을 훔쳐 도망쳤다. 섭섭함을 토로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말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살자.” 그런 남편을 아내는 한없이 존경했다. 이 일을 시작으로 그는 문제아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99년 10월 2일 토요일 이른 아침. “일찍 들어올게. 맛있는 거 준비해놓고 기다려”란 말을 남기고 남편은 출근했다. 부부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두 시간 뒤 건축 현장 17층 철탑 엘리베이터에 갇힌 채 남편은 추락했다. 하나님은 바로 남편을 데려가지 않고 아내와 작별할 수 있는 2주를 허락했다. 10월 17일 주일 아침 남편은 하늘나라로 떠났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던 아들마저…

당시 중1이던 아들 정수는 의연했다. 주변에선 “네가 아빠 대신 엄마를 돌봐야 한다”고 말했다. 2001년 설 명절을 앞둔 어느 날, 목욕탕에 간다던 아들이 새벽 2시쯤 퉁퉁 부운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누구한테 두들겨 맞았는지, 얼굴이며 몸이 성한 곳 하나 없었다. 아들이 흐느끼며 말했다. “엄마, 나도 아빠처럼 17층에서 떨어져 죽고 싶어.”

엄마는 ‘쿵’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들은 아빠를 잃고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런 정수에게 엄마를 돌봐야 한다는 짐까지 안겼으니…. 어린 자식의 무거운 어깨를 엄마는 모르고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밤낮으로 보험설계, 정수기 판매 등 닥치는 대로 일하느라 아들을 살피지 못한 거다. 엄마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그해 여름, 청소년 수련회에 갔던 아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달라졌다. 공부도 열심히 해 대학생이 됐다. 군대가기 한 달 전 아들은 친구들과 엠티를 갔다. 밤늦게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내 보고 싶나.” “그럼. 우리 아들 보고 싶제.” “엄마, 아빠도 없이 내 이렇게 잘 키워줘 고맙데이. 내 군대가도 엄마 걱정할 거 없다. 친구들이 엄마 잘 보살펴 줄기다.” “니 별 걱정 다한데이.” “내 세상에서 엄마 제일 존경하는 거 알제? 그래도 엄마보다 하나님 더 사랑한다.”

아들과 전화를 끊고 엄마는 “하나님, 저 아들 잘 키웠지요”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5시간 뒤 연락을 받았다. 2006년 12월 1일 천금같은 그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망연자실했다.

더 많은 아들, 딸을 위하여 봉사

남편은 40년, 아들은 그 절반을 이 땅에서 살았다. 남편과 달리 아들의 죽음 앞에선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주변에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이라며 위로했다. 대체 그게 뭐기에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데려간단 말인가. “하나님은 없다”고 부인했다.

아들 차량은 맞은편에서 신호를 무시한 채 달려온 음주운전 차량에 정면을 받혔다. 가해자의 아버지란 사람이 찾아와 대신 용서를 구했다. 어떻게 용서를 바란단 말인가. 그런데 그의 입에서 ‘용서’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우리 하나님이 용서하랍니다. 교회 다니세요.” 그렇게 복음을 전했다.

전 집사는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었다. 중보기도 봉사단에 들어가 40도를 넘나드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중국 땅밟기 기도모임에 참석했다. 비장애인도 걷기 힘든 그 행군을 다리가 불편한 전 집사가 이끌었다. 소록도에서 한센인 봉사활동도 했다. 필리핀 오지 선교도 수차례 갔다왔다. 전화상담 사역도 했다. 그렇게 몸을 가만두지 않았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 추운 겨울 기도원에 올랐다. 4일 금식하고 5일째 예배당 한구석에 쓰러질 듯 앉아 호소했다. “대체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마침 강남교회 전병금 목사가 축복에 관한 신년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 목사의 설교 내용이 바뀌면서 창세기 4장 25∼26절의 말씀을 들려줬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창 4:25) 그는 전율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다른 씨’들을 맡겼고 “나는 너를 원한다”고 응답하셨다.

치렁치렁 길었던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다. 치마에서 바지로 갈아입었다. 소년원 봉사를 다니고 가출 청소년, 교회학교 학생들을 딸 아들 삼아 집밥을 해먹이며 말씀을 가르치려면 편한 게 최고였다. 교회학교 고등부 부장인 그는 매주 토요일 자신의 집에서 고등부 학생 20여명과 큐티 모임을 갖는다. 3년 넘게 학생들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설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교회와 소년원, 상담센터 등에서 만난 문제 청소년을 데려다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도 멈추지 않고 있다.

장애인선교부를 맡아 소외 이웃을 돌보는 데도 열심이다. 4년 전부터는 밀양구치소를 주 1회 방문해 큐티 프로그램도 갖는다. 요즘엔 ‘쉴만한 물가’라는 이름의 쉼터도 구상 중이다. “지금은 주거공간에서 제한된 아이들을 만나지만 쉼터를 세워 더 많은 아들, 딸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게 마지막 사명이고 꿈입니다.”

부산=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