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영성] 하나님을 보는 기도

입력 2013-11-15 17:37

그리스도인이란 기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누군가 당신에게 ‘올바로 기도하고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크리스천에게 기도는 여전히 곤혹스러운 주제이며 모호한 죄책감마저 갖게 한다. 아직도 기도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남아 있는 것이다.

수도사들은 홀로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해 사막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평생을 기도하면서 다양한 기도를 만들고 가르쳤다. 그 기도들 가운데 교회 역사상 가장 길고 영향력 있는 기도가 두 개가 있는데 바로 관상기도와 화살기도였다.

관상기도와 화살기도

관상은 헬라어로 테오리아라는 말로 초대교회 교부들은 이를 ‘하나님을 보는 것’으로 이해했다. 2세기 말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학교 교장 클레멘트는 ‘하나님을 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으며, 하나님을 보고 아는 것이 최고의 관상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소개된 관상에 대한 개념은 이집트에서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4세기 말 원로 수도사 파프누티우스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는 말씀에 근거해 육신의 욕망을 버리고 마음이 순결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다음과 같은 체험이 따라온다고 가르쳤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일을 묵상하고, 볼 수 없는 세상을 관상하는 단계로 올라가게 됩니다. 육체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고, 영적인 황홀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때 육적인 귀로는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고, 현재의 사물들이 육신의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며, 곁에 있는 것들조차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 단계는 기이하고 신비하기에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관상가의 마음에 있는 기쁨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단 것을 맛본 적이 없는 자가 꿀의 단맛을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입으로 맛봐야 그 맛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관상은 사막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신비들 가운데 최고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단계였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등을 보여주신 사례(출 33:23)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원하시는 사람에게 원하시는 만큼만 자신을 드러내신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얻어지는 체험이 아니다. 오늘날 관상기도를 기술로 가르치는 곳들이 있는데, 그들은 관상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니 절대로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사막교부들이 노력한 지고의 목표는 관상이 아니라 마음의 순결이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출 33:19)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달린 문제이다.

같은 시대의 원로 이삭은 마음이 성화하고 발전하는 데 따라 기도도 발전한다고 가르쳤다. 높은 기도의 상태에서는 불덩어리 같은 기도를 드리는데, 하나님을 관상하고 정답게 대화하며 사랑에 도취하여 불타는 기도를 드린다고 말했다. 이삭은 천상의 영광스런 예수님을, 즉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그리스도의 광채와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때 하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고(고전 15:28), 하나님과 하나 되어 생각하고 말하고 모든 것이 주와 일치된 사랑의 연합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이삭 또한 파프누티우스처럼 깨끗한 믿음과 덕행, 순결한 마음을 가진 이만이 이를 체험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를 위해 그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식할 수 있는 성경 구절들을 추천하고 이를 반복하여 기도로 사용하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70:1) 이 짧은 기도는 다음의 유익한 점들이 있다고 한다. 첫째 모든 감정을 포괄한다. 둘째 위기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 셋째 겸손하며 경건한 고백이다. 넷째 악을 경계하며 두려워한다. 다섯째 자기는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여섯째 응답을 믿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한다. 일곱째 보호자가 가까이 계심을 믿고 끊임없이 부른다. 이러한 이집트 수도사들의 짧은 기도를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화살기도라고 불렀다. 화살처럼 빠르게 순간적으로 하나님께 날아간다는 의미다.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사막 수도사들이 발전시킨 위의 두 기도를 두고 한국교회 일부에서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기도라고 이단시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한국교회가 만든 기도들이 있지 않은가. 특히 새벽 기도회와 회중이 동시에 부르짖는 통성기도는 다른 나라에서 찾을 수 없는 우리 고유의 기도 관습이다. 전자는 1906년 길선주 장로의 주도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기도이고, 후자는 그 다음해 1월 14일, 같은 교회에서 일어난 평양대부흥운동의 저녁부흥회에서 담임목사 이길함 선교사의 인도로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것들을 만들고 유지하면서 왜 다른 나라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가. 기도에 대한 참된 평가 기준은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가에 달려 있다. 그 증거를 두고 분별하는 지혜를 갖자.

김진하 교수 <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