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전정희] 필리핀 糧饌
입력 2013-11-15 18:02
“여송국(呂宋國) 표류인들에게 공해(公 )를 지급하고 양찬(糧饌)을 계속 대어주면서 풍토를 익히고 언어를 통하게 하라.”
조선 순조 9년(1809년) 임금이 이같이 말했다. ‘필리핀 조난자에게 살 집을 제공하고 먹을 것을 대주는 것은 물론 문화를 익히고 말을 배우게 하라’고 명한 것이다. 이들 표류인 5명은 순조 1년 제주 해안가에 닿았다. 그런데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시 필리핀이 스페인 식민지였으니 스페인어나 그들 언어 타갈로그어를 썼을 것이다. 조선에 역관이 있을 리 없었다. 손짓 발짓 다 해 막가외(莫可外)라는 나라에서 표류해 왔다는 것까지 통했는데 그 나라가 어디 붙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조선 정부는 할 수 없이 청나라 심양 예부(禮部)로 보내 ‘이상한 사람’들을 처리해 달라고 요청한다. 한데 청나라 예부에서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다며 돌려보냈다. 그 원행에서 한 명이 죽었다. 그렇게 돌아온 그들은 물설고 땅 선 곳에서 또 한 명이 죽었다. 이 해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필리핀 말을 하는 흑산도 사람 문순득과 필리핀 표류인의 대면이 이뤄진 것이다. 문순득은 그들이 제주에 닿았을 때 반대로 표류하다 필리핀에 닿았던 것이다. 똑똑했던 문순득. 필리핀 사람의 형모와 의관을 기록하고 말도 배워왔던 것. 문순득에 관해서는 정약용의 ‘경세유표’에 나와 있다.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기에 그에 관한 기록이 남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필리핀 표류인들. 9년 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으니 그 감회가 어떠했겠는가. ‘조선왕조실록’은 ‘미친 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울고 외쳤다’고 전한다. 그들이 말했던 막가외는 마리아의 음역이었던 듯싶다. 조선은 그들을 9년간 거두었다. 그리고 여송국 사람이란 걸 알게 된 후 다시 심양을 통해 그들 나라로 돌려보냈다. 이것이 우리나라와 필리핀 사이의 첫 기록이다. 그들은 당시 하이옌과 같은 태풍으로 제주 해안까지 떠밀려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여송국 필리핀은 1960년대 만 하더라도 우리가 부러워하는 동남아시아의 선진국이었다. 1521년 마젤란에 의해 발견된 후 스페인, 미국, 일본 식민지를 거쳐 1946년 독립국가를 세웠다. 독립 후 막사이사이 같은 인물이 미국식 개혁으로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 65년 집권한 마르코스는 공산세력을 척결하고 국가 재정을 탄탄히 해 우리가 부러워하는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마르코스는 개발도상국 지도자들이 그렇듯 장기집권하면서 몰락했다.
60∼70년대 우리의 롤 모델 필리핀은 딱 거기까지였다. 72년 계엄령을 선포한 마르코스가 장기집권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그들은 빈곤의 나락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 우리처럼 민주화운동이 거셌는데도 말이다. 우리의 10분의 1 수준의 국민소득에 지나지 않는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필리핀 수도 마닐라입니다”라며 농구 ‘우주중계’를 듣던 선진국 필리핀이 더는 아닌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와 비슷한 길을 걷던 경쟁자 필리핀은 왜 ‘허들 경주’에서 넘어져 버린 것일까? 그 원인은 다름 아닌 부패다. 국제투명성기구 발표 부패인식지수가 176개국 중 최하위권인 것이다. 경찰이 강도로 돌변한다. 이러니 죽어나는 건 국민이다.
6·25 ‘재난’ 때 우리를 도왔던 필리핀. 그들이 슈퍼 태풍 재앙을 맞았다. 순조가 ‘살 집과 식량을 계속 대주라’ 했듯 인도적 지원이 절실하다. 국제 두레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 경제 규모에 비해 500만 달러 지원은 어딘지 쑥스럽다.
전정희 디지털뉴스센터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