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흥우] 후계의 유혹

입력 2013-11-14 18:07


“다툼을 깔끔하게 마무르려면 피해자인 민주당 의견을 존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전국(戰國)을 통일한 진시황에서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에 이르기까지 2130여년간 211명의 황제가 중국을 통치했다. 강희제, 건륭제처럼 60년 이상 권좌를 지킨 천자도 있지만 황제의 평균 재위기간은 10년 남짓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 그냥 나온 사자성어는 아닌 듯하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권력이 세습되던 왕조시대에 최대 관심사는 후계 문제였다. 왕위를 누가 승계하느냐에 따라 집권층의 정치적 운명이 달라진 역사적 사례는 동서를 가리지 않는다. 집권세력이 기득권 보호를 위해 후계 문제에 깊숙이 간여한 까닭이다. 후계 메커니즘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칼을 겨누고,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끔찍한 골육상쟁의 비극이 빚어졌다.

대통령 5년 단임제를 채택한 우리에겐 ‘권불오년’이란 말이 더 잘 어울린다. 이는 집권세력이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는 5년마다 자신들 입맛에 맞는 대통령을 만들려는 ‘후계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말과 상통한다. 현 정국을 ‘식물정국’으로 만든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의혹 역시 이명박정부의 후계유혹에서 비롯됐다. 이제 의혹이라고 부르기엔 지금까지 사실로 드러난 사례가 너무 많다. 국민의 손으로 권력을 직접 뽑는 민주주의시대에 그런 시도를 했다는 건 주권재민의 헌법 가치를 전면 부정하는 중범죄임에 틀림없다.

추정컨대 이명박정부는 임기 후반 ‘노무현 트라우마’에 시달렸을 것이다. 대선이 다가올수록 점점 증세가 심해져 급기야 해서는 안 될 범죄의 구렁텅이로 이명박정부가 빠져든 것으로 생각된다.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임기 중 노 전 대통령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한데 차기 대통령으로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으니 당시 MB맨들이 겪었을 불안과 공포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문재인이 당선된다면…’이란 가정 자체를 떠올리거나 용납하기 싫었을 거다. 무조건 문재인을 떨어뜨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무리수를 둔 게 아닌가 싶다.

박근혜 대통령 말마따나 국가기관의 댓글 조작 때문에 박 대통령이 당선됐다고는 보기 어렵다. 확실한 증거까지는 아니더라도 댓글이 18대 대선의 108만여표 차를 뒤집을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심증만 있어도 민주당의 저항과 반발은 지금보다 훨씬 강도가 셀 것이다. 민주당이 여전히 ‘대선 불복은 아니다’는 공식 입장을 견지하는 건 댓글의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댓글 조작은 결과적으로 헛짓이 된 셈이다. 억울한 사람은 박 대통령이다. 도와 달라고 한 적도 없고, 도움을 받을 생각도 없었는데 일은 지난 정권에서 벌여놓고 그 뒤치다꺼리를 하려니 울화가 치밀 법도 하다. 취임 1년차는 만신창이가 됐다. “지난 정권 때의 일”이라며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심정이 이해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원인을 제공한 쪽의 책임이 큰 만큼 마무리 책임 또한 박 대통령과 여권이 지는 게 옳은 수순이다. 최근 민주당을 중심으로 댓글 사건 특검 도입을 위한 ‘신야권연대’가 출범했다. 새누리당은 ‘야합연대’로 깎아내리며 특검 도입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새누리당은 11년 전 일을 새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16대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57만여표 차로 패하자 무효 소송과 재검표를 밀어붙인 게 새누리당 전신 한나라당이다. 국가기관의 조직적 선거개입이 없었음에도 한나라당은 ‘개표오류설’을 제기하며 그렇게 했다. 그에 비하면 민주당 요구는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더욱이 선거 결과를 뒤집거나 부정하는 데 있는 게 아니고 댓글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주된 목적이 있다면 야당으로선 충분히 할 수 있는 요구다.

피해자는 민주당이다. 다툼을 깔끔하게 마무르기 위해선 피해자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주는 게 좋다. 그래야 뒤끝이 없다. 역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의 검찰 수사로는 깔끔한 갈무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그게 문제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