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필리핀] “가족 생사 몰라 고향에…” 갑판 곳곳엔 흐느낌만

입력 2013-11-14 17:57 수정 2013-11-14 22:21


구성찬 기자, 필리핀 해군 수송선 단독 동행

“타클로반에 살고 있는 가족의 생사조차 모릅니다. 애타는 마음에 직장까지 그만두고 가족을 찾으러 가는 중입니다.”

필리핀 세부 인근 라파엘 라모스 군항에서 13일(현지시간) 새벽 6시에 출발한 바코로드시티호에는 어떻게든 고향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구호물자를 실은 해군 수송선을 가까스로 얻어 탄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 배는 출발한 지 25시간이 지나서야 레이테주 타클로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슈퍼태풍 ‘하이옌’으로 쑥대밭이 된 고향의 처참한 모습이 눈부신 아침햇살 속에 드러나자 갑판 곳곳에서 흐느낌이 들려왔다. 전기와 통신이 모두 끊겨 고향에 남아 있던 가족의 생사를 확인조차 못했던 이들이다. 고향에 도착했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진 참담한 모습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엄마와 함께 마닐라에서 생활하던 핑키 모로요(17)양은 가족을 찾아 나선 다른 30여명과 함께 배에 올랐다. 다니던 공장까지 그만뒀다는 모로요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아버지와 여동생 2명이 타클로반에 살고 있는데 생사조차 모른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세부에서 일하고 있다는 테디 마카베로(32)씨는 “부모님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서 “항구에 도착하는 대로 가족의 행방을 찾아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마카베로씨는 부상자가 많다는 소식에 소독약과 같은 응급의약품을 가능한 한 많이 챙겨간다고 했다. 연락이 끊긴 부모님이 제발 부상자들 속에라도 포함돼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바코로드시티호는 당초 마닐라에서 출항할 때만 해도 타클로반으로 직항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하이옌과 같은 경로로 피해지역을 향하던 열대성 저기압 ‘소라이다’의 영향으로 기상이 악화되자 라파엘 라모스 군항에 피항하는 바람에 세부에 있던 가족들과 구호 요원들도 함께 승선할 수 있었다. 통조림과 쌀, 식수 등 200여t의 구호물품 중 상당수는 지난달 세부 인근 보홀 지역 지진 피해 주민들을 위해 국제적십자사 등이 제공한 것이다. 이미 선적돼 있던 보홀 지진 피해자 구호물품에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의 구호물품이 보태졌다. 대규모 구호물품을 공항이 아닌 항구로 실어나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바코로드시티호가 타클로반항에 도착하자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고향을 찾은 주민들은 구호품과 함께 고향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집을 찾아 나서는 모로요양과 마카베로씨의 등 뒤에 불안감이 느껴졌다.

바코로드시티호=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