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푸틴 대통령의 무례, 외교부는 꿀먹었나
입력 2013-11-14 17:34
국가 간 정상외교에서 의전은 더없이 중요하다. 정상은 나라를 대표하기 때문에 문명국이라면 상대방 정상을 만날 때 당연히 최고의 예우를 갖춰야 한다. 초청한 쪽, 초청 받은 쪽에 상관없이 한 치의 실수도 허용될 수 없다는 게 외교가의 상식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난 13일 방한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대한민국과 박근혜 대통령한테 상당한 외교적 결례를 범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당초 오후 1시 정각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과 단독 정상회담을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무려 28분이나 지각했다. 박 대통령이 시간에 맞춰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2∼3분만 늦어도 큰 실례가 되는 것이다. 황당한 것은 늦은 이유가 의전 상 계획에도 없던 ‘사적 용무’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호텔을 나서다 대한삼보연맹 관계자와 삼보 도복을 입은 초등학생 등 30여명을 보고 차에서 내려 일일이 악수를 하느라 시간을 지체했다는 것이다. 삼보가 러시아 국기(國技)라서 반가운 나머지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으나 의전 상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단독 정상회담이 늦춰지면서 30분간으로 계획했던 확대정상회담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끝내야 했고, 오후 3시15분으로 예정됐던 공식 오찬은 5시 가까이 돼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점심이 저녁이 돼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현오석 경제부총리 등 우리 측 장관 5명은 꼼짝없이 점심을 굶어야 했다.
러시아 측 무례는 ‘정상회담 지각’뿐만이 아니다. 푸틴 대통령은 당초 12∼13일 1박2일 일정으로 방한할 예정이었으나 불과 2∼3일 전에 당일치기로 바꿔버렸다. 앞선 베트남 방문 일정이 달라져서라는데 외교 관행상 흔하지 않은 일이다. 정상회담 직후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러시아 측 통역의 한국말이 서툴러 박 대통령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도 우리로서는 기분 나쁜 일이다.
푸틴 대통령의 정상회담 지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9월 러시아에서 박 대통령과 처음 만날 때도 1시간 이상 늦었으며 2008년 이명박 대통령,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을 만날 때도 각각 40분가량 지각했다. 실수라고 보아 넘길 수 없는 상습적인 무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전에도 청와대나 외교부가 항의를 했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없다. 저자세 외교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푸틴 대통령이 과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다른 나라 정상들을 만날 때도 더러 지각을 했었다고 해서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분명하게 유감을 표명하는 것이 당장은 껄끄러울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 양국 간 신뢰 구축에 도움이 될 것이다. 다른 나라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