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허공을 채워넣는 오묘한 상상력… 최승호 시집 ‘허공을 달리는 코뿔소’
입력 2013-11-14 17:32
“허공을 달리는 코뿔소는 갈 곳도 없고 못 갈 곳도 없다.” 이성복, 최승자와 함께 그로테스크한 시적 리얼리티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최승호(61) 시인이 신작 시집 ‘허공을 달리는 코뿔소’(문학동네 임프린트 난다)에 쓴 ‘시인의 말’이다. ‘시의 자유를 꿈꾸는 한 권의 완전한 시, 그 시들만의 방’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난다詩방’의 첫 주자로 최승호를 선택한 것도 그렇지만 ‘허공을 달리는 코뿔소’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시집은 그야말로 허공 갖고 놀기다. 텅 빈 채 모든 것을 담아내는 허공처럼, 허공을 주무르는 허공의 주인공처럼, 공(空)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자유로운 형식의 시편이 눈길을 끈다.
“카카오톡에서 카카오톡으로 뛰어다니는/ 톡토기 문자를 아시는지/ 톡토기 문자와 톡토기 문자 사이로 해 지고 달 뜨고// 우주복으로 뚱뚱해진 우주인들이 달에서 돌을 조금 떼어내서 지구로 귀환한 뒤로 달은 늘 일그러져 있다. 아마 분석 중인 그 월석(月石)을 다시 달에 갖다놓는다 해도 이미 처녀성을 잃어버린 달은 늘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달의 돌’ 전문)
‘달의 돌’은 시인이 빚어낸 사유의 돌덩어리다. 좀처럼 하강하지 않고 우리들 머리 위를 떠도는 궤도 이탈된 사유의 돌. 그걸 툭툭 건드려보거나 던져놓는 시인의 상상력은 우리가 ‘이것이 시다’라고 알고 있는 기존의 시 형식보다 좀더 유연한 시의 자유를 지향한다.
“고비 사막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가위에 눌리곤 했다. 가위에 눌리다 눈을 떠보면 내가 아직도 살아 있었고 다리가 넷 달린 식탁 위에 조용히 앉아 있는 코가 긴 주전자가 보였다.// 내 마음의 사막에 늑대가 산다/ 네 마음의 사막엔 여우가 살지/ 사막 한 가운데서/ 늑대와 여우가 만난다 해도/ 고독의 등뼈가 하나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바람 부는 어떤 밤이면/ 내 마음의 모래산꼭대기에서 늑대가 울부짖는다/ 내 마음의 모래산꼭대기에선 여우가 울부짖겠지”(‘사막’ 부분)
시집은 시인 자신이 오랫동안 관심을 두었던 생태적인 문제에서부터 죽음, 이별, 만남 등의 화두에 이르기까지 어떤 구분도 두지 않은 채 오로지 그때그때의 직관에 기대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이면을 아주 건조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의 시어는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것은 물론 모래알처럼 빛나기도 한다. 시란 광맥 깊이 숨겨진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사막의 모래처럼 지천으로 깔려서 스스로 빛나고 있는 그 무엇임을 최승호는 시와 광고카피가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는 우리 시대에 불쑥 내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게 시가 될까’, 하고 시인들이 시 한 줄을 써놓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 최승호는 ‘이게 시가 될까’라는 시작법의 척도를 슬그머니 내려놓은 채 사유의 돌을 사방팔방으로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최승호는 좀더 고독해졌을 것이다. 좀더 자유로워졌을 것이다. 좀더 당당해졌을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시는 어떤가. “식어가는 질화로를 껴안고/ 재를 뒤적거리던 그 겨울/ 흙벽에 너펄거리던 그림자// 죽은 뒤에 이야기가 시작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다. 굴원(屈原). 예수, 징기스칸을 보라!”(‘재’ 부분)
‘난다詩방’은 앞으로 최정례 시인의 제임스 테이트 번역시집, 김민정의 동시집 등 시에 관한 모든 것을 다양한 형식으로 담아내 새로움에 목말라 하는 독자들을 찾아갈 계획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