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온도계의 철학’ 국내 번역 출간… 과학철학계 독보적 존재 英 케임브리지대 장하석 교수

입력 2013-11-14 18:43


“과학, 정답이 있는 학문? 치열한 세계관의 산물이지요”

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석(46) 석좌교수는 2004년 ‘Inventing Temperature(온도의 발명)’란 책을 현지에서 발표해 세계 과학철학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이 책으로 그는 이듬해 영국 과학사학회가 주는 이반 슬레이드 상을, 2006년엔 영문 과학철학 서적 중 탁월한 책에 주는 러커토시상을 연거푸 받았다. 그 화제작이 ‘온도계의 철학’(동아시아)이란 제목으로 지난달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과학과 철학, 역사학을 넘나들며 ‘통섭의 길’을 걷고 있는 그를 지난달 30일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과학철학과 교수가 됐지만 그의 첫 꿈은 물리학도였다. “중학교 3학년 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접한 뒤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영어를 잘 못해 처음엔 한 페이지 읽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죠. 그렇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원서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지요.” 유학을 떠나 미국 노스필드 마운트 허만 고등학교를 거쳐 명문 캘리포니아공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당연하다고 인식되는 사실에까지 시시한(?) 질문을 날리는 그를 바라보는 교수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다소 엉뚱해보였다고 할까. “물리학과에선 저보다 머리 좋은 친구들을 정말 많이 봤어요. 바로 문제를 풀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죠. 근데 저는 그만큼 안 똑똑해서인지 늘 왜 그렇게 되는 거지, 생각에 깊이 잠기곤 했죠.” 결국 과학철학으로 행로를 바꿨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과학철학계에서의 첫 연구 역시 과학계의 고정관념에 대한 엉뚱한 문제제기로부터 출발했다. ‘온도를 측정하는 온도계의 온도가 맞다는 건 어떻게 측정해서 확인할 수 있을까.’

답을 찾기 위해 영국과 미국의 주요 도서관과 박물관의 학회지, 관련 자료, 문헌 등을 샅샅이 뒤졌다. 10년의 여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18, 19세기 ‘물이 끓는 점’을 100도로 고정하고, 이를 근거로 온도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과학계가 다양한 실험과 격론을 벌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은 초등학생도 당연하게 인식하는 표준 온도의 개념. 하지만 당시엔 세계적인 과학자 뉴턴조차 ‘혈온(사람 피의 온도)’을 온도 측정의 고정점으로 사용하는 오류를 범했을 정도로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흔히 과학은 사실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측정을 통해 과학적 사실을 얻게 되지만, 그 측정 기준을 정할 때엔 당대 과학자의 세계관이 반영되지요. 그런 면에서 과학은 사실뿐만 아니라 세계관을 담고 있는 겁니다.”

그 연장선에서 그는 ‘과학적 다원주의’를 강조한다. “과학을 정답이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하면 이런 태도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죠. 하지만 과학이 꼭 정답 있는 문제만 다루는 건 아니에요. 저는 인간이 문화의 절대주의를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진보라고 생각해요.”

케임브리지대에서의 생활은 어떨까. “제 아내한테 묻는다면 아마 ‘맨날 일하지 뭐’라고 답할걸요”라며 웃었다.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자택에서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주로 연구실에 쳐박혀 지낸다는 얘기다. 이따금 자전거 타고 교외로 나가거나 클래식부터 아일랜드 전통음악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듣는 게 유일한 취미다.

그는 ‘나쁜 사마리아인들’로 유명한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의 동생이다. 장하준 교수는 평소 지인들에게 “동생이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며 자랑한다고 한다. 형 얘기를 꺼내자 장하석 교수는 “형은 학생회장을 도맡아 할 정도로 활발했던 반면 저는 조용히 뭔가에 파묻혀 지내는 걸 좋아했다”며 “제 장점은 질기다는 것,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이번 책 발간을 계기로 EBS 과학철학 강연을 준비하는 등 한국 대중과의 소통을 넓혀갈 계획이다.

케임브리지=글·사진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