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구호현장 르포] 첨탑 십자가 부러지고 지붕 무너졌지만 이재민들에 피난처 제공
입력 2013-11-13 17:49
타클로반 교회, 태풍 만난 이웃들의 방주가 되다
드높은 교회의 첨탑에 부러진 십자가가 거꾸로 달려 있다. 이곳에서 가장 큰 필리핀 연합교회다. 지난 8일의 태풍으로 교회 창문이 모두 부서지고 지붕은 찢겨졌다.
폐허가 돼 버린 교회 안에서 13일 아침 찬양 소리가 들려왔다. 태풍을 피해 교회에 모인 5가정 교인 20여명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 교회 담임 레뮤엘 이발라로사 목사의 사모 조세핀(51)씨는 “태풍에 집이 부서진 사람들과 시내에서 떨어진 곳에 있어 불안한 분들이 교회로 모였다”며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고 구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레뮤엘 목사는 피해주민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기 위해 외부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고 했다. 이 교회는 태풍 이후 매일 저녁 예배를 드린다. 아침에 모인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딸 코레인조(20)씨는 태풍이 들이닥치던 순간보다 교회가 부서진 것을 봤을 때 더 놀랐다고 말했다.
“새벽부터 바람이 거세게 불고 비가 폭포처럼 쏟아졌어요. 집안에까지 물이 들어와 퍼내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날이 밝아 밖으로 나왔을 때 교회가 완전히 부서진 것을 보고 모두 충격을 받았습니다.”
태풍 이후 남편과 함께 교회 사택에서 머물고 있다는 리시스 로살린다(58)씨는 “먹을 것이 없어 가게를 털던 사람들이 이제는 가정집까지 쳐들어와 교회로 옮겨왔다”고 전했다. 심장병이 있는 남편은 예배실 의자에 누워 있었다. 그는 “병원도 모두 문을 닫았다”며 “한 임신부가 병원에 가지 못해 길거리에서 애를 낳을 뻔했는데 소방대원이 겨우 싣고 갔다”고 말했다. 교인이 아닌 주민들도 교회에 찾아와 물과 식량을 얻어 갔다. 교회 마당에는 지하수를 퍼올리는 펌프가 있어 경찰들도 여기서 씻고 있었다. 교회가 이곳 주민들의 작은 대피소가 된 셈이다.
“사실은 저희도 타클로반을 잠깐 떠나려고 했습니다. 사택도 물에 잠겼고 교인들도 빠져나가고 있어요. 그런데 어제 다른 도시의 교회에서 비상식량을 보내줬습니다. 이 식량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계속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에서 온 기자를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것 같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이곳에 있기를 원하시는 것 같아요.”
부러진 십자가와 찢긴 교회를 재건할 계획이 있냐고 묻자 조세핀 사모는 “지금은 교우들을 돌봐야 할 때이고 외부의 도움이 절실하다”며 “예배당 수리는 그 다음 문제”라고 말했다.
타클로반(필리핀)=글·사진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