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염성덕] 김장의 추억, 그리고
입력 2013-11-13 17:44
제법 크게 농사짓는 집안이었다. 식사 인원만 여남은 명이 넘었다. 조모 부모 삼촌 4남매, 그리고 집에 매인 일꾼이 네댓쯤 됐다. 일꾼 한 명은 마을 어귀에 집을 짓고 살았지만 나머지 일꾼은 행랑채에 묵었다.
평상시도 소란스럽지만 김장철에는 집안이 더욱 시끌벅적하다. 품앗이하러 이웃집 아낙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때문이다. 남정네들은 김장독을 묻기 위해 땀을 뚝뚝 흘리며 땅을 판다. 아낙네들은 절인 배추를 물에 씻어 싸리로 엮은 평상에 널어놓는다. 물기가 빠지면 배추에 소를 채우는 아낙네들의 손길이 분주해진다. 애들은 해바라기를 하면서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뭔가 간절히 기다리는 눈빛이다.
“권아, 이리 오렴.” 드디어 어머니가 부른다. 권이는 쏜살같이 달려간다. 그 뒤로 동생들도 내닫는다. 삶은 돼지고기와 소를 배추 속잎으로 돌돌 만 속대쌈이 입속으로 들어간다. 매콤한 보쌈김치 맛이 꿀처럼 달다. 추위에 떨면서 기다린 보람이 있다. 경북 출신인 권이네 김장 담그는 풍경이다. 규모가 작을 뿐 여느 집도 김장을 담근다.
‘김장은 겨울철의 반 양식’이라고 한다. 양식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긴요하다는 말이다. 김장을 묘사한 구절이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 나온다. 예로부터 김장은 가정의 중요한 행사였다. 사철 채소가 흔한 요즘에는 과거보다 김장의 중요성이 덜하다. 그래도 김장 김치는 우리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다.
김장을 담그러 강원도 시골에 있는 친구네로 갔다. 양념에 생새우 오징어 노가리를 넣고 골고루 버무렸다. 먹음직스런 배추김치 총각김치 고들빼기김치 갓김치 막김치가 만들어졌다. 새참으로 나온 속대쌈은 별미였다.
김장을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친구 어머님이 햇밤과 땅콩을 내민다. 손사래를 치지만 그분의 고집을 꺾을 순 없다. 그리곤 “어여 가라”고 두어 차례 손을 내젓는다. 하직 인사를 하자 미소를 지으시곤 눈길을 돌린다. 조금 전까지 저녁 먹고 가라고 은근히 채근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뒷짐을 진 채 먼 산만 바라본다.
아들과 친구는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어머님이 더 연로하기 전에, 기력을 잃기 전에 오자고. 이듬해 봄철 장을 담글 때 오기로 약속한다. 이참에 진장계(陳藏契)와 장계(醬契)를 만들자는 말이 오간다. 그래야 1년에 두 번이라도 방문할 테니까. 아들과 친구를 태운 차량이 시야에서 멀어진다. 그때까지 어머님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계신다. 망부석(望夫石), 아니 망자석(望子石)처럼.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