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사랑’ 월영교 물안개로 만나다

입력 2013-11-13 17:16


아침마다 애틋한 수채화로 피어나는 만추의 안동호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원이 엄마의 편지 때문일까. 지아비의 쾌유를 위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삼은 지어미의 애틋한 사부곡 때문일까. 월영교 반영이 생사(生死)의 경계처럼 선명한 수면에서 하얀 물안개가 그리움처럼 피어오른다. 이어 허공으로 사라지는 물안개의 성긴 틈새로 수면을 채색한 단풍이 원이 엄마의 단심(丹心)처럼 서럽도록 붉다.

만추의 안동호는 아침마다 거대한 솜사탕을 담는 그릇으로 변신한다. 밤새 호수에서 피어오른 물안개는 드넓은 수면에 차곡차곡 쌓였다가 아침햇살이 쏟아지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리고 육중한 안동댐을 타고 넘어 낙동강을 점령한다. 월영교를 비롯해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이 물안개에 잠기고 안동시내 고층아파트는 꼭대기만 희미한 형체를 드러낸다.

‘호수의 고장’ 경북 안동은 초가을부터 늦가을까지 아침마다 피어오르는 물안개로 인해 한 폭의 수묵화를 연출한다. 기와집과 초가집을 비롯한 고택과 안동호와 임하호 등 호수, 그리고 구절양장 흐르는 낙동강과 반변천이 만들어내는 풍경 중에서도 안동민속촌이 위치한 안동댐 일대의 물안개가 으뜸으로 꼽힌다.

안동댐 물안개가 가장 신비스러운 곳은 유교랜드가 위치한 안동문화관광단지 옆의 KBS 드라마 해상촬영장. 드라마 ‘태조 왕건’을 비롯해 ‘명성황후’ ‘제국의 아침’ 등을 촬영한 해상세트장에는 함선 3척과 나루터, 그리고 초가집 몇 채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여행을 온 듯 생경하다. 한치 앞도 안보일 정도로 짙은 물안개가 허공 속으로 사라지자 호반에 뿌리를 내린 자작나무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는 기름기가 많아 탈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한반도의 개마고원과 백두산 일대, 러시아와 핀란드 등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는 하얀 피부로 인해 ‘숲속의 귀족’으로 불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작나무가 문학작품의 소재로 사랑을 받아온 까닭이다. 자작나무는 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이 가장 서정적이다. 칠판에 분필로 마구 그은 선처럼 보이는 자작나무 숲을 도화지 삼아 물안개가 덧칠을 하면 안동호는 더욱 신비롭다.

물안개는 안동댐 아래에 위치한 은행나무 거리에서도 황홀한 풍경화를 그린다. 안동댐에서 첫 번째 다리인 영락교 방향으로 약 500m 구간은 은행나무 가로수가 낙동강을 따라 한 줄로 도열한 호젓한 산책로. 아름드리 은행나무 밑에는 낙엽이 양탄자처럼 두툼하게 깔려 있어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폭신한 느낌이 든다.

은행나무 거리 입구에서 단풍으로 물든 산길을 오르면 안동댐 일대를 한눈에 굽어보는 정자가 물안개 속에서 우뚝 솟아있다. 정자에 오르면 동락골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호반도로와 단풍으로 물든 산, 그리고 안동호가 물안개와 어우러져 시시각각 다른 느낌을 연출한다. 이어 아침노을에 하늘이 붉게 물들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른 물안개가 안동댐을 넘을 준비를 한다.

영락교와 월영교 사이에 위치한 월영공원은 단풍나무와 은행나무를 비롯해 메타세쿼이아 등이 저마다 원색의 미를 뽐내는 공간. 도로 옆 중앙선 기차가 산자락을 타고 오르내릴 때마다 기적소리에 놀란 단풍잎이 시나브로 원을 그리며 떨어진다. 안동물문화관 앞에 위치한 작은 표지석은 안동에서 상주, 구미, 대구, 합천, 창녕, 양산을 거쳐 부산의 낙동강하구둑에 이르는 낙동강종주자전거길(389㎞)의 출발점. 표지석 옆에는 빨간 공중전화박스 모양의 인증센터가 앙증맞다.

물안개는 안동댐 아래 두 번째 다리인 월영교에서 짙은 그리움으로 피어오른다. 월영정을 가운데 두고 한 켤레의 미투리가 서로 마주보는 형상의 월영교는 길이가 387m로 안동물문화관과 건너편의 안동민속촌을 연결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나무 상판 인도교인 월영교는 잔잔한 수면에 달빛이 비치고 색색의 조명이 물감을 풀어놓은 듯 황홀한 초저녁 풍경을 으뜸으로 꼽는다. 하지만 월영교가 세워진 사연을 알고 나면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늦가을 아침만큼 감동적인 순간도 없다.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 <중략>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중략>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428년 전 조선시대의 한 여인이 죽은 남편을 애도하면서 쓴 편지다.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원이 엄마의 편지’는 1998년 안동에서 묘지 이장 작업을 하던 고성 이씨 문중의 이응태(1556∼1586) 관속에서 발견되었다. 편지는 조선판 ‘사랑과 영혼’ 이야기로 회자되며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미라로 변한 남편의 관속에는 젊은 아내가 머리카락을 잘라 삼은 미투리 한 켤레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복중 아기의 배냇저고리가 온전하게 보존돼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400여 년이 흐른 2003년, 후세 사람들은 젊은 부부의 사랑을 기리고자 안동댐 아래에 미투리를 닮은 월영교(月映橋)를 세웠다. 죽은 남편을 향한 원이 엄마의 사무친 그리움이 물안개로 변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만추의 이른 아침. 미투리를 가슴에 품은 동상으로 거듭난 원이 엄마가 영가대교 남단에서 월영교를 바라보고 있다.

안동=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