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 낙엽도 詩를 읊을까… 만추의 서정 그윽한 영남대로 과거길

입력 2013-11-13 17:15


조선시대에 부산에서 한양으로 가려면 영남대로를 이용해야 했다. 영남대로는 김천 추풍령을 넘는 열엿새길, 영주 죽령을 넘는 열닷새길, 그리고 경북 문경의 새재를 넘는 열나흘길 등 세 가지이다. 과거보러 가는 선비들은 이 중에서도 문경새재(조령)를 넘는 열나흘길을 선호했다. 시간을 하루 이틀 단축하는 이점도 있지만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선비들은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문경새재를 넘기 전 영남대로 중 최고의 험로로 꼽히는 토끼비리를 통과해야 했다. 명승 제31호로 지정된 토끼비리는 문경 오정산의 층암절벽 사이로 난 길이 1㎞, 폭 1m의 벼랑길. 그 옛날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길에 나선 선비들은 이 벼랑길을 엉금엉금 기어가듯 넘어야 했다.

경북팔경 중 으뜸으로 꼽히는 진남교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토끼비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걸었던지 칼날 같은 바위가 닳고 닳아 거울처럼 반들반들하다. 지금은 토끼비리 옆으로 나무데크 탐방로가 개설되어 있지만 몇 해 전만해도 토끼비리에 서면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오정산과 낙동강 상류인 영강, 그리고 옛 국도 3호선이 나란히 S자로 굽어 돌아 ‘산태극 물태극 길태극’으로 불리는 진남교반은 우리나라 길의 역사가 한 곳에 모인 길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용되던 토끼비리는 일제강점기 건설된 옛 국도 3호선에 자리를 내준다. 태극 형태의 옛 국도 3호선은 다시 산자락을 관통하는 새 국도 3호선에 자리를 내줘 마치 인생유전을 보는 듯하다.

토끼비리를 통과한 영남대로는 낙엽이 발목 깊이로 쌓인 오솔길을 걸어 고모산성의 진남문 속으로 들어간다. 고모산성은 삼국시대에는 삼국의 세력이 팽팽히 맞서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산성의 규모를 보고 놀란 왜군이 텅 빈 줄도 모르고 진군을 주저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한국전쟁 격전지였기도 한 고모산성에는 옛 성황당과 복원된 주막이 있어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고모산성을 출발한 영남대로는 3번 국도를 따라 문경새재에 진입한다. 새들도 날아 넘기 힘들다는 문경새재길은 제1관문인 주흘관에서 시작된다. 주흘관에서 조곡관을 거쳐 조령관까지 이어지는 6.5㎞의 문경새재길은 시가 흐르는 옛길이다. 승용차가 교행할 정도로 넉넉하게 정비된 비포장 고갯길엔 나그네들의 숱한 사연과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용추를 비롯한 비경들이 수십 미터 간격으로 도열해 과거로의 여행을 안내한다.

조령산의 산세가 개성의 송악산을 빼닮았다고 해서 용사골에 들어선 드라마 ‘태조 왕건’ 사극 촬영장을 지나면 조선시대 길손들의 숙박과 물물교환장소로 이용되었던 조령원터와 무인 주점인 무주암, 그리고 국밥 한 그릇에 시장기와 여독을 풀던 주막이 반갑게 길손을 맞는다.

주막 인근의 교귀정은 신·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수인계하던 정자로 길섶에 뿌리를 내린 노송 한 그루가 교귀정의 운치를 더한다. 이곳을 지나던 김종직은 이름 없는 정자를 ‘교귀정’이라 명명하고 시 한 수를 선물한다. ‘교귀정에 올라 앉아 하늘과 땅을 즐기는데/ 문득 깨달으니 귀밑머리 흰빛이로다/ 한 가닥 흐르는 물은 바람과 더불어 노래 부르고/ 즈믄 바위는 그림 같건만 날은 점점 저물어만 가누나/…’

팔왕폭포로 유명한 용추는 예로부터 선비들이 즐겨 찾던 경승지로 퇴계 이황을 비롯한 수많은 선비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퇴계가 극찬한 용추의 큰 바위는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왕건과 술잔을 나눈 직후 측근인 은부의 칼을 받는 장면을 촬영한 곳. 궁예는 이 너럭바위에 무릎을 꿇은 채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어. 인생이 찰나와 같은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욕심을 부렸을꼬? 허허허. 이렇게 덧없이 가는 것을…”이라며 마지막 독백을 남긴다.

제2관문(조곡관)에서 백두대간 고개에 위치한 제3관문(조령관)까지는 발목 깊이로 쌓인 낙엽과 징검다리로 이루어진 ‘시가 있는 옛길’이 운치를 더한다. 김만중 정약용 이언적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인들이 문경새재를 넘으면서 남긴 시는 모두 359수. 문경새재길 곳곳에는 이들이 남긴 시가 화강암에 새겨진 채 낙엽 더미 속에서 나그네를 맞는다.

백두대간 조령산과 마패봉 사이에 위치한 조령관의 남쪽은 경북 문경이고 북쪽은 충북 괴산이다. 낙동강 뱃길과 영남대로를 달려온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넘어 한달음에 충주 탄금대에 이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한강 뱃길을 이용해 한양을 향한다.

문경=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