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슈퍼태풍 하이옌 후폭풍…“제발 우리 얘기 외부에 알려주세요”
입력 2013-11-13 03:39
국민일보 김지방·구성찬 기자 필리핀 피해 현장을 가다
필리핀 중부 레이테주 타클로반 외곽 산호세에서 12일 만난 시나 다제스(20·여)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제발 우리 이야기를 외부에 알려 달라”고 호소했다. 겨우 군인이 제공한 차를 타고 가족과 함께 탈출했다는 그는 “아이들이 굶어죽을까 걱정된다. 먹을 것이 없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지난 금요일 새벽 엄청난 비바람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타클로반에서 태어나 평생을 바닷가에서 살았지만 처음 경험하는 비바람이었다. 금세 집안까지 물이 닥쳤다. 무릎 높이까지 찼던 빗물은 가슴높이까지 올라왔다. 2층으로 서둘러 피신해보니 지붕은 바람에 날아가고 언니들과 10여명의 조카가 한데 모여 울고 있었다. 도로는 빗물이 성난 강물처럼 넘쳐나고 있었다. 언니와 조카를 끌어안아 빗물을 헤치고 간신히 안전한 곳에 도달했다. 집에 있던 음식과 물 등이 모두 쓸려가 버렸다.
그는 “가게에서 물건을 빼오는 것은 나쁜 일인 줄 알지만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며 상점에 있던 물건을 가져왔다고 털어놨다.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조카를 살리기 위해 이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거리 곳곳에는 “도와주세요. SOS, 식량이 필요합니다”라고 쓴 팻말을 들은 피해자의 모습도 보였다. 레이 마르샤 필리핀 군 대위는 “사람들은 분노에 차 있고 이성을 잃었다”면서 주의를 당부했다.
현장 도착에 앞서 둘러본 타클로반 공항터미널 역시 굶주림에 지친 채 헤어진 가족을 찾거나 안전한 곳을 향해 대피하려는 수천명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험악한 인상의 필리핀 군인은 메가폰으로 연신 사람들을 향해 “뒤로 물러서세요”라며 소리를 질렀다.
이날 오전 필리핀 공군 C-130 수송기 2대가 도착해 구호물자가 도착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정작 수송기에는 군인만 가득했다. 이들 중 일부는 특수부대원이었다. 이 지역의 약탈이 극심하다는 소식 때문에 필리핀 정부가 치안확보를 위해 파견한 것이었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공항의 치안부터 확보했다.
사람들은 무작정 공항으로 온 경우가 많았다. 태풍으로 도로 등이 파괴되면서 서너 시간 이상을 걸어 이곳에 온 사람도 있었다. 피난민은 현지 관리에게 마닐라로 피난하는 수송기에 탑승시켜 줄 것을 요구했지만 관리들은 묵묵부답이었다.
타클로반은 평상시에도 치안이 불안했던 곳이라고 현지 구호단체 관계자들은 소개했다. 특히 태풍이 할퀴고 간 뒤에는 ‘혼돈스러운(Chaotic) 무정부 상태’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11일 긴급 구호에 나섰던 국제적십자사의 요원 한 명이 굶주린 현지 주민의 구호물자 약탈 과정에서 숨지는 사건도 발생했다.
필리핀 정부는 타클로반 치안 확보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마누엘 로하스 내무장관은 “장갑차량 4대와 400명의 군·경 인력을 투입해 시내를 순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는 별도로 의료지원 및 구조팀에 자체 발포령을 내렸다.
피해지역을 탈출한 이들은 안도감에 눈물을 쏟았다. 타클로반 도착에 앞서 세부에서 만난 한국인 피해자 소현아(28·여)씨는 3일간 세부 북부 말라파스쿠아에 갇혀 있다가 현지인의 도움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는 “엄청난 바람에 유리창이 모두 깨졌고 문이 부서질까 문을 열고 버텼다”면서 “외국인 여행객 중에서 실종자가 있었다”고 말했다.
타클로반·세부=김지방 구성찬 기자, 이제훈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