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박철] 하비에르 신부와 일본의 개화
입력 2013-11-11 17:56
“기독교는 탄압했지만 교역은 허용했다. 우리도 하멜 표류 때 개방했더라면…”
1549년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스페인 신부가 일본 규슈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일본을 방문한 첫 유럽 선교사였다. 일본 땅에 기독교 복음 전파가 시작된 역사다. 이후 약 100년 동안 수많은 선교사들이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본 막부시대를 겪었다. 이후 1649년 유럽의 선교사들은 수많은 순교자를 남기고 일본 땅에서 철수하고 만다.
스페인 태생의 이그나시오 로욜라는 1534년 유럽 땅이 아닌 인디아(동양을 지칭함)에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예수회를 설립하고 당시 미지의 땅 동양으로 선교단을 파견하였다. 하비에르 신부는 리스본 항구를 떠나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지나 인도의 고아(Goa)를 거쳐서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좋은 날씨를 기다려 출항해 일본 규슈 지방에 도착하였다. 일본 땅에 도착하자마자 하비에르 신부는 스페인어로 장문의 편지를 써서 처음으로 유럽에 보냈다.
그 내용 중에는 “이곳 사람들은 서로 서로가 예절을 많이 표시하며, 일상적으로 무기를 소중히 여기고 무기에 크게 의존한다. 14세가 되면 벌써 칼과 단도를 지니고 다닌다. 일본 사람들은 음식을 적게 먹으나 술은 많이 한다. 이들은 쌀로 빚은 술을 마시는데 왜냐하면 이곳에는 포도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결코 도박을 하지 않는데 이것은 도박을 큰 불명예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 땅에 최초로 도착한 하비에르 신부, 중국 베이징에 1601년 최초로 입성한 마테오 리치 신부, 1593년 임진왜란 중 한국 땅을 최초로 밟은 세스페데스 신부가 동양 3국에 최초로 도래한 유럽 선교사들이다.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오다 노부나가는 기독교에 매우 호의적이었으며, 큰아들은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었고, 노부나가 자신도 스스로 절반은 기독교도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만일 노부나가가 부하에 의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일본 기독교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선교사들은 조선을 침략한 히데요시를 천민 출신의 잔인한 폭군으로 기술하였고, 기독교의 적으로 간주하였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추종자들과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한 후 1612년부터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규슈 지방에서 기독교 신자를 색출해내기 위해 ‘후미에(성화상 밟기)’를 시작하였다. 1868년 명치유신까지 14대에 이어진 절대권력 도쿠가와 막부시대 250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도쿠가와 막부는 기독교를 철저히 배척했지만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나가사키 항구를 개방하여 독점교역을 허가하였다. 막부는 앞선 서양의 문화를 계속 받아들이고, 일본의 것을 서양에 알리고 싶어했다. 종교는 거부했지만 글로벌 무역은 허용한 것이다. 이와 같은 도쿠가와 막부 정책은 오늘날 선진 일본을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근대 역사가들은 일본이 명치유신으로 개화하여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1549년 성(聖)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신부의 도착이 일본 개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00년간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유럽 선교사들은 인쇄 활자, 대포, 총, 화약 등 서양의 문물을 일본 땅에 가져왔다. 스페인산 말(馬)과 검, 심지어 인도산 코끼리까지 가져왔다. 하비에르 신부의 기독교 전파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일본의 개화는 성공하게 했다. 그 틈새로 네덜란드는 일본 나가사키 항구에서 독점 교역권을 얻었다. 화란 상인들이 가져온 서양 문물은 일본을 크게 성장 발전하게 하였다.
1653년 일본으로 항해하던 화란인 하멜이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왕국은 서양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고 긴 동면을 계속했다. 종교는 받아들이지 못해도 무역은 허용하는 실리주의를 택했다면 한국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현자(賢者)는 역사에서 배운다.
박철 (한국외국어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