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서독과의 체제경쟁 밀린 동독, 개혁·개방 끝까지 거부

입력 2013-11-10 18:44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은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 나뉘었다. 동독은 이후 소련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확립해 나간다. 1949년 정부 수립과 함께 소련 헝가리 폴란드 불가리아 북한 중국 등 공산국가들과 국교를 맺은 동독은 서독에 맞서 자신들이 독일의 정통성을 부여받은 유일 국가라는 주장을 펼쳤다.

모든 분단국가가 그렇듯이 동독은 서독과 본격적인 체제 경쟁에 나섰다. 사회주의통일당(SED) 독재 아래 국가 주도형 계획경제를 도입하는 등 체제 안정을 위해 노력했지만 ‘라인강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서독의 경제발전 상황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60년대 들어 동독의 국가 권력은 발터 울브리히트에게로 넘어간다. 대통령인 빌헬름 피크가 사망하고 대통령직이 폐지되자 권력이 당 서기장인 울브리히트로 집중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독재체제는 동독 국민들의 체제 혐오를 부추겼고, 이는 대규모 탈출로 이어졌다. 탈출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20∼30대의 젊은층으로 나타나자 동독 정부는 이런 현상이 체제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베를린 장벽이다. 61년 동베를린 시민들이 서독 지역인 서베를린으로 넘어가는 상황이 지속되자 울브리히트는 베를린 장벽 건설을 지시했다. 그해 8월 동·서베를린 경계에 45㎞에 달하는 철조망 벽이 설치되면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동·서독 간 인적 교류는 사실상 막히게 됐다.

울브리히트 후임으로 등장한 에리히 호네커 당 서기장 역시 개혁·개방을 단호히 거부했다. 서독의 동방정책이 가시화되면서 동·서독 간 방문 교류 역시 조금씩 활성화될 조짐을 보였으나 사회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이를 거부한 것이다. 호네커는 훗날 망명지에서 쓴 회고록을 통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맹렬히 비난했다. 소련의 개혁·개방이 소련 국내뿐만 아니라 동유럽 전체 사회주의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의미다. 그는 책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자본주의 세력과 크렘린의 배신자들, 동독의 심약한 당 간부들이 결국은 동독을 쓰러뜨렸다”고 비난했다.

남혁상 기자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