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남북통일 위해선 서울·평양 대사관부터 설치를”
입력 2013-11-10 18:43
베르너 페니히 베를린 자유대학교 명예교수
베르너 페니히(69) 베를린 자유대학교 명예교수는 한반도 통일에 대해 “남북이 통일되기 위해선 서울과 평양에 대사관이 설치되는 정상적인 국가 관계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언론진흥재단 후원으로 지난달 28일 베를린 자택에서 이뤄진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독일이 짧은 기간 통일을 이뤘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동방정책(Ostpolitik)을 통해 오랜 기간 일관성 있게 통일의 토대를 닦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어떻게 계승됐나.
“브란트는 통일의 씨를 뿌렸고, 이후 서독 총리들은 이 통일의 씨를 키우고 수확했다. 실제 동방정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74년 브란트의 비서 귄터 기욤이 동독 간첩임이 밝혀졌다. 그는 사퇴했고, 동방정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서독 내부에서 높아졌다. 하지만 이후에도 동방정책의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브란트를 이은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가 계속해서 동방정책을 유지해 나갔기 때문이다. 1990년 통일을 완성한 헬무트 콜 전 총리도 동방정책을 버리지 않았다. 사실 브란트와 슈미트 전 총리는 같은 사회민주당(SPD) 출신이기 때문에 정책의 연속성이 있었다. 하지만 콜 전 총리는 야당 기독민주당(CDU) 소속이었다. 콜 전 총리는 하이델베르크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사학자다. 앞을 내다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동방정책을 높이 평가했고,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이전 정부의 통일·외교 정책과 완전히 다른 것인가.
“서독 초대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의 서방정책(Westpolitik)은 동독을 인정하지 않고 미국 등 서방 국가와의 관계를 중요시했다. 그리고 튼튼한 안보와 경제 발전을 중시했다. 일견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완전히 다르게 보이지만 브란트도 서방 국가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라인 강의 기적’을 일군 사람이 2대 총리인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였다. 튼튼한 경제와 안보야말로 동방정책을 할 수 있는 밑거름이다. 브란트 정부 직전 서독 정부의 수장이었던 쿠르트 게오르그 키징거는 재임시절인 1967년 1월 동구권 국가인 루마니아와 수교했다. 과거 서독 정부의 외교 정책인 할슈타인(Hallstein) 원칙을 폐기한 것이다. 할슈타인 원칙은 서독만이 자유선거에 의한 정부를 가진 유일한 독일의 합법국가이므로 서독은 동독을 승인하는 나라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다. 키징거 전 총리는 또 대연정을 통해 브란트를 외무장관으로 앉힌 인물이기도 하다.”
-동방정책의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현실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분단 독일의 현실과 유럽의 현실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부터 동방정책은 시작됐다. 브란트는 현실을 인정한 뒤 스스로 변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방정책에서 가장 중요했던 시기는 1972년이다. 그 해 12월 21일 브란트와 동방정책의 설계자로 알려진 에곤 바르 특임부 장관은 동독과 동·서독 기본조약(Grundlagenvertrag)을 체결했다. 동독에 서독 대사관이 설치된 것이다. 이로 인해 동·서독 관계가 국가간, 규칙적인 관계로 변했다.”
-한국이 독일의 동방정책에서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가.
“먼저 일관된 통일·외교 정책이 필요하다. 한국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독일)는 통일의 토대를 만드는 데 있어서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일관된 정책으로 통일의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햇볕정책을 펼쳤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잘 안다. 그러나 2000년 6월 평양에서의 역사적 만남(남북정상회담)의 효과는 이제 사라진 것 같다. 한 가지 그에게 아쉬웠던 점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왜 동·서독 대사관과 같은 남북사무소를 설치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랬다면 좀 더 남북 교류가 정상적인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남북통일을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통일은 항상 내적 관점과 국제적 관점이라는 두 가지 요인을 가지고 있다. 이 중 통일을 위해선 내적 관점, 즉 내부적 정상화가 우선이다. 다시 말해 남한과 북한이 평범한 국가처럼 정상화되는 것이다. 교류와 대화, 우편이나 전화연결이 이뤄져야 한다. 정상화는 한 쪽에서 먼저 해주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인식했으면 좋겠다.”
-동독과 북한은 어떻게 다른 것 같은가.
“동독에선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시민들은 개혁을 요구했다. 모두가 통일을 외친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아직 아닌 것 같다. 북한에 600만 명의 지도급 엘리트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을 가 본 경험은 있는가.
“한 번 가봤다. 1985년 9월 2주 동안 베를린 자유대 교수로서 초대를 받았다. 당시 인상은 철저하게 준비됐고, 곳곳에서 감시를 했다는 기억이다. 또 기억나는 것은 어린이들이 마실 우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북한체제는 끔찍하고 비인도주의적인 정권이다.”
◇베르너 페니히 명예교수=독일 베를린자유대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미국 하버드대에서 수학했다. 한반도와 중국 등 동아시아 전문가로 현재 베를린 자유대 명예교수 및 한국학연구소 고문으로 있다.
2005년 남북정상회담 5돌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주관했고, 이명박정부 시절인 2010년 통일부와 ‘독일의 통일·통합 정책 연구’라는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연구했다.
베를린=글·사진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
■ 자문해주신 분들
△김재신 주독일 대사 △리아나 가이데치스 독일환경자연보전연맹(분트) 그뤼네스 반트 센터장 △베르너 페니히 독일 베를린자유대 명예교수 △신은숙 민주평통 통일정책자문국장 △악셀 슈미트 괴델리츠 독일 동서포럼 이사장 △알렉산드라 힐데브란트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장 △우베 리켄 독일 자연보전청 경관생태국장 △이봉기 주독일대사관 통일관 △크리스토프 보네베르거 전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 교회 목사 △한나 베르거 베를린 장벽박물관 홍보담당관 △최월아 민주평통 북부유럽협의회장 △한스 모드로 전 동독 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