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빌리 브란트는 누구

입력 2013-11-10 17:41

10代 사회주의, 20代엔 반나치 운동

퇴임후에도 서독 외교 막강 영향력


독일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빌리 브란트(Willy Brandt·1913∼1992) 전 서독 총리는 독일인은 물론 전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그는 10대에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다 20대에는 반(反)나치 운동가로도 활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민주당(SPD) 소속 시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 그는 1957년 서베를린 시장을 거쳐 1964년 SPD 당수가 된다. 2년 뒤 외무장관을 지낸 그는 1969년 총리직에 올랐다.

가난한 가정에서 아버지 없이 태어난 그는 유년시절과 청년시절 많은 방황을 했다. 그가 SPD에 처음 입당하게 된 것은 불우한 가정환경과 노동자였던 외할아버지 영향이 컸다. 이후 더욱 급진적이었던 사회주의노동자당(SAP)에 가입하면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조선소 노동자로 일했다.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러나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의 활동은 여러 제약을 받기 시작했고, 20대에 노르웨이로 망명을 떠났다.

사실 빌리 브란트는 그의 본명이 아니었다. 그의 본명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칼 프람이었다. 망명 시기 브란트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하면서 노르웨이 국적을 취득해 신문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 같은 망명 전력은 그가 훗날 정치에 뛰어들었을 때 상대방의 주된 공격 대상이 되곤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 국적을 회복한 그는 SPD에 재입당해 정치 경력을 쌓아나갔다. 브란트의 총리 재임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1969∼74년 5년간에 불과하다. 1974년 그의 자진 사퇴는 총리 시절 총애하던 귄터 기욤이 동독 출신의 간첩으로 밝혀진 데 따른 것이었다.

브란트는 총리 사임 후에도 여전히 정력적인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1987년까지 SPD 당수를 맡았고 전반적인 서독의 외교정책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자신의 동방정책이 밑거름이 된 독일 통일을 직접 볼 수 있는 행운도 맛봤다. 독일 통일 2년후 췌장암이 악화돼 사망했다.

남혁상 기자 hsnam@kmib.co.kr